다음 여섯 편의 글들은 칼빈 탄생 500주년 기념사업회 홈페이지에 게재된 Calvin theo(칼빈의 신학)를 번역한 글이다. calvin09.org를 참고.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의 선포

 

에베하르트 부쉬 (괴팅엔대학교)

 

칼빈은 영광이라는 말과 유사한 개념들로 광채, 빛남, 명성, 기쁨, 숭고, 평화, 행복과 아름다움이라는 용어들을 사용한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세 차원을 갖고 있다.

 

1. 하나님의 하늘 영광

이 말은 칼빈이 직접 한 표현이다(『기독교강요』 IV. 5.17).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다는 사실은 “그가 어떤 특수한 장소에 갇히신 것이 아니라 만물에 편만하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우둔한 지성은 그의 영광을 달리 이해하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영광과 존엄보다 더 높고 더 충만한 하늘이라는 말로 우리에게 그의 영광을 표명하신다”(III. 20.40)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영광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속한다. 하나님이 영광스러운 분이시다. 하늘의 의의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현재에 달려 있다. 만약 그가 부재하시다면, “하늘은 아득한 곳에 있다”. 만약 그의 영광이 빛난다면, 거기에 하늘이 있다.

그러므로 그의 영광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세상 저편에 위치시켜서는 안 된다. 그와 반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지시하는 수많은 표시들에 둘러싸여 있다. “우리가 눈을 어디로 돌리든지 이 세계에는 적어도 하나님의 영광의 섬광이 빛나지 않는 곳은 하나도 없다”(I.5.1). 특히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에게서 창조주는 “마치 거울에 비치듯이”(II.12.6) 그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바라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이 외적인 표시들을 통하여 빛을 발하더라도, 그것은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다(I.15.3).

지금 당장은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단지 간접적으로만 인지할 수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하면, 좀 더 명확하게 그것을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죄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 “뛰어난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 예속되어야 한다”(IV.5.17). 그러나 우리가 세상적인 것들의 광채를 마음에 둔다면, “하나님의 영광의 거울로 창조된 세계는 그 자체가 그 자신의 창조자가 된다”. 그러면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하나님이 자연이다”(I. 5.5). 그리고 다음의 일이 일어날 것이다: “세계의 광경이 우리의 눈앞에 크게 나타나는 한, 그것은 우리의 시선을 가로막을 것이며,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은 암흑 속에서처럼 빛을 잃게 될 것이다”(디도서 강해 2,13; CO 52,424).

 

2. 중보자의 영광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는 하나님 아버지가 아니라 그의 유일하신 아들이신 우리의 “형언할 수 없는 영광의 하나님”이다(I.13.10). 그의 신성을 가리키는 것이 영광이다. 그러나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이신 그의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그들의 죄 때문에 그것을 볼 수 없는 사람들에게 나타날 것이다. “만약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 그의 아버지의 영광의 광채라는 말을 듣는다면, 아버지의 영광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날 때까지 너의 눈에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왜냐하면 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밝히는 유일한 빛일지라도, 단지 이 광채 안에서만 그 빛은 우리에게 도달하기 때문이다”(히브리서 강해 1,3, CO 55,12). “그리스도께서 중보자로 나타나셔서 두려운 영광의 보좌를 은혜의 보좌로 변화시켜 주시기까지는” 하나님의 영광을 중보자 없이 대면하는 것은 우리에게 심히 무서운 일이다(III.20.17). 하나님의 은혜와 그의 영광은 결속되어 있다. “영광이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선하심 안에서 그것이 빛을 발하는 것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그가 그의 선하심 가운데서 자신이 영광스럽게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보다 그에게 더 본질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에베소서 강해 1,11; CO 51,152). 그는 “약함 가운데 있는 우리를 돕기 위해 오실 때 가장 영광스럽게 그의 능력을 나타내신다(골로새서 강해 1,11; CO 52,82).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이 이와 같이 보이게 될 때 우리가 그것을 참으로 보게 될 까? 칼빈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신성의 확실한 증거인 영광을 지각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광이 모든 사람에게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맹목 때문에 무시된 채로 있다. 다만 성령에 의해서 눈을 뜬 사람들만이 그의 영광의 발현을 알아차린다”(요한복음 강해 1,14; CO 47,15).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계시는 저마다 자기 멋대로 소용할 수 있는 계시를 양산하지 않는다. 성령에 의해서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영광에 열려져 있고, 그런 식으로 우리는 그것을 그의 미래의 계시의 약속의 형식 아래서 깨닫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 믿음은 그것이 살아 있는 곳에서는 반드시 영원한 구원에 대한 소망을 불가분리의 동반자로서 그 곁에 가지고 있어야 한다”(III. 2.42). 우리는 소망을 믿음에서 떼어놓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영광의 소망”(골로새서 강해 1,27; CO 52,97)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복음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정하신 미래의 영광의 광채를 인식한다”(로마서 강해 5,2; CO 49, 89f.). 이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1)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에게 장차 올 영광의 소망을 주신다. (2) 이 영광은 이미 복음 안에서 표명된다. (3) 이 영광은 기쁨의 원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허락된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기대된 계시 안에서, 그것은 “그가 택하신 모든 자들이 그것에 참여하도록, 모든 방향에서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디도서 강해 2,13; CO 52, 424). 우리에게 허락된 이 참여는 순전히 은혜로 인한 것이다(III. 21.7). “하늘 영광의 소망이 지상의 깨어지기 쉬운 그릇 안에 담겨질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이다”(골로새서 강해 1,27; CO 52,97). “우리 자신만을 바라보면, 지금까지 우리의 구원이 소망 가운데 감춰져 있지만,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복된 영생과 영광을 소유하고 있다”(에베소서 강해 2,6; CO 51,164).

두 제안들이 정당하다. “복음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정하신 미래의 영광의 광채를 인식한다.” 그리고 또 “하나님 나라에는 영광이 가득하고 또 그것은 옳은 말이지만, 그것은 아직도 우리의 지각에서 아주 멀고, 또 희미한 것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 날이 와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나타내시고,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보기까지는 그런 상태가 계속된다”(III. 25.10).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과 함께 그 날을 향해 나아간다(마태복음 강해 6,13; CO 45,203). 우리는 아직 곤경 속에서 살고 있다. 단지 그때 “주께서 자신의 백성을 치욕으로부터 영광으로 옮겨주신다”(III. 18.4). 기다리는 동안, 길을 잃어버리지 말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그의 의로운 의지에 집중하자.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는 나타나시면서 세계의 짙은 안개를 없애실 것이며, 그래서 아무것도 그의 영광의 광채를 흐리게 할 수 없게 하실 것이다”(디도서 강해 2,13; CO 52,141). 그때에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 “그의 영광스러운 은혜에 대한 찬양”이 울려 퍼질 것이다(에베소서 강해 1,5; CO 51, 149). “우리가 이제 더 이상 그의 긍휼을 받기만 하는 자들이 아닐 그 때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가운데서 최고로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에베소서 강해 1,11; CO 51,152). 이 목표에 이를 때, 하나님께서 중심이 되실 것이지만, 그러나 그의 피조물들이 없이는 홀로 그렇게 되지는 않으실 것이다. 그는 그들을 영접하실 것이며 그들을 자신에게로 이끄실 것이다. 그때에 그들은 평화와 휴식을 얻게 될 것이다. “신자들의 영혼은 힘든 싸움과 노동을 마친 후에 약속된 영광을 누리는 기쁨과 함께 기다리던 안식에 들어가게 된다”(III. 25.6).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사고와 행동의 중심으로 삼기

 

크리스티안 링크 (보쿰대학교)

 

칼빈의 신학은 그 지지자들이 박해에 직면하는 시기에 특히 그것의 특유한 성격을 취한다. 그것은 진리와 거짓을 구분할 것을 요구하고, 그것의 신앙고백을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를 알고 있다. 초기 반-종교개혁의 상황에서 칼빈의 신학은 로마 교회와 갈등 속에 있는 새로운 신앙에 지적인 장비를 제공하였지만, 그러나 사람들이 이혼에 의해 고통당하는 것처럼 불가피한 분열로 인해 고통당하였다. 그러한 신학은 그것의 시대적인 관련성을 부인할 수 없다. 그 신학은, 여타의 다른 신학보다 더 많이, 신랄한 논쟁을 경험했지만, 그것은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공동체의 완전성에 관한 확고하고 구체적인 관심사를 드러냈다. 특히 종교개혁의 새로운 중심적 요소, 즉 그리스도에 대한 그것의 증거에서 그러하다. 그것은 교회의 방향에 관한 토론에서 가장 분명한 표현을 발견하였다.

칼빈의 가장 뛰어난 논쟁적인 저서들 가운데 하나는 제네바를 가톨릭교회의 품에 도로 데려오기를 바랐던 추기경 사돌렛(Sadolet, 1539)에게 보냈던 그의 회답이다. 칼빈은 종교개혁에 대한 그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확실히, 내가 주로 의도했던 것은, 그리고 내가 위하여 열심히 일했던 것은 당신의 (하나님의)그리스도의 능력과 은혜를(모든 그럴듯한 설명들을 깨끗이 없애고) 매우 분명하게 나타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모호함과 경건한 모든 설명들(칭의와 성만찬의 교리들 안에 있는)을 혐오하는 이 명료함은 우선 하나님의 지식에 대한 열쇠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에 관하여 궁극적인 확신을 가져오는 신학적 반성의 명료함이다. “하나님께서 육신 안에서 나타나셨다”는 표현은 강하게 자주 반복되면서 그 사실을 강조한다. 그는 중보자이며, 그로써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킨 심연을 메우는 중보의 다리가 된다. 그러므로 그는 또한 성서 전체의 이해를 결정하는 준거점이다. 칼빈이 그의 첫 번째 저서들 가운데 하나인 불어판 올리베탕 성서 서문(“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사랑하는 자들에게”, 1535)에서 중요한 인문주의적 개념을 사용하여 이미 지적했던 것처럼, 여기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고 또 현재의 삶에서 배워야 하는 모든 지혜”도 마찬가지이다. 신학은 삶에 대처할 수 있는 지혜를 제공한다는 주장과 함께 칼빈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상처입기 쉽고 허약한 우리의 실존에 주어진 제안, 성공적인 삶을 이끄는 우리의 노력에 초점을 두는 제안으로 해석하였다. “만약 우리가 어리석은 자들이라면 - 그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지혜이시다. 만약 우리가 죄인들이라면 - 그는 우리의 의이시다. 만약 우리가 경건하지 못한 자들이라면 - 그는 우리의 성화이시다... 만약 우리가 죽음의 육신을 지니고 있다면 - 그는 참으로 우리의 생명이시다.”

우리는 여기서 칼빈이 그의 성서 강해서들을 확장시키며 - 계속적으로 판이 거듭될수록 부피가 커진 그의 주저 『기독교강요』에서 확대시키고 발전시킨 주요 주제들을 발견한다. 이 주제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16세기에 크게 논쟁이 되었던 칭의의 주제, 특히 아래의 질문과 같은 것이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삶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까? 어떻게 그 명백한 오류들과 우리의 잘못들을 끝장낼까? 그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제안하신 친교에 의지하여, 그를 “좀 떨어져 있고 우리 밖에 있는” 방관자의 관점이 아니라 “우리를 그 자신과 하나가 되게 하시는” 바로 그분으로서 고려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우리 스스로 우리의 구원을 탐색하는 우리의 헛된 노력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그의 의와의 친교 등은 오늘날과 같이 그 시대에 교회 자체가 선택한 활동들(세상의 일들)에 힘을 소모하고 매몰되고 마는 교회에 칼빈이 제시한 신학 프로그램이었다. 그렇지만, 이 메시지는 세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한 기독교적인 실존에 대한 호소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의를 발견한 사람은 세상의 불의에 순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설교에서 경제와 정치적 문제들에 관하여 그와 같이 단호하게 입장을 표명한 신학자는 없다(특히 그의 신명기서 설교들을 참조) - 어떤 사람들은, 다소간 비판의 여지가 있지만, 세상적인 일들을 실현해가는 그의 정력적인 시도들을 생각하면서 그를 현대 세계의 아버지로서 묘사하고자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어떤 다른 것이 있었고 계속 문제가 되는 것이 있다. 칼빈이 창조세계의 선물들에 대한 합법적인 사용을 찬성했는지, 가난한 자들에게서 받는 이자를 찬성했는지, 혹은 그가 법 앞에서 만인의 평등을 위하여 왕의 독재에 맞서 투쟁했는지, 공공질서가 보호해야 하는 자유의 수호자가 되었는지 아닌지 하는 것들이다. 그가 관심하는 것은 우리의 윤리가 존중하는 표준이며, 거기서 나오는 행동들이다. 그리고 칼빈은 이 표준을 그리스도가 그의 지상 생활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실천에서 찾았다. 그리스도에 의해 나타난 의의 이 표준이 우리의 실생활을 주관해야 한다. 신학 용어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칭의의 목표는 성화에, 곧 아무 조건 없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것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그의 성화에 참여할 때만 그를 소유할 수 있을 뿐이다. 그는 조각으로 찢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일치는, 아마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것인데, 내가 칼빈의 가장 빛나는 통찰들 가운데 하나로서 간주한 통찰에서 묘사된다. 그는 성서 윤리의 기초 서적인 모세의 율법 또는 토라를 그리스도와 아주 밀접하게, 그 둘을 범주에 따라 분리하는 대신에(오랜 성서주석학의 전통에서 그랬던 것처럼) 연결하였다. 칼빈은 하나님 나라의 모든 약속은 이미 율법에 포함되어 있다고 가정하였다. 따라서 구약과 신약성서 안에 있는 구원의 선포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 모두 다 “같은 실질적인 내용”에 의해 살아간다. 사람들이 유대인들에게, 그리고 후에는 개혁파 기독교인들에게 책임을 돌리는 “율법주의”는 본래 바울이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다도”(롬 7:12)라고 불렀던 계명에 대한 충실함이었다. 왜냐하면 이 율법은 그리스도를 예기하며 하나님 자신이 주신 것이고 그러므로 그것은 말하자면 “그의 이름으로만” 성취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리스도가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충만하게 계시될지라도, “그리스도는 이미 율법 아래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만약 우리가 이 사실을 진지하게 경청한다면, 우리는 마음 편하게 우월에 대한 모든 감정을 떠나서 유대교와 만날 수 있다!

거꾸로,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던 것과 같은 칭의와 성화, 그리고 신학적 반성과 기독교적 행동 사이의 일치는 칼빈이 “미래의 삶에 대한 명상”(meditatio futurae vitae)으로 묘사한 목표를 일별하게 한다. 만약 기독교인들의 실천이, 그들의 성화가 한편으로 예수의 십자가를 향해 방향을 정위한 뒤따름을 나타내고 우리를 갈등에 의해 찢겨지고 수많은 악들에 의해 고통을 당하는 “불안한” 세상에 환상 없이 대면시키는 것이라면, 다른 한편 그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가기 시작한다. 기독교인의 행동의 준칙으로서 율법은 구약성서의 배경에서는 참으로 희망의 길, 미래의 길, 현재에 비하여 새롭고 게다가 또 혁명적인 길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미래의 삶을 향한 방향정위는 이것이 사실상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세상에로의 우리의 통합이 아니라 그 대신에 “성도의 교제”에로의 통합을 수반한다는 것을 이해했는지를 시험한다.

자신을 이 공동체로서 생각하고 그의 반성과 행동의 중심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교회는 틀림없이 이 세상을 위해 필수적인 것을 인식하고 행동할 수 있을 것이다.

 

성령의 중요성과 구원에서의 그의 역할

 

마르크 비알 (제네바대학교)

 

성령의 문제는 칼빈의 사상에서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한다. 사실 『기독교강요』의 절반이 성령의 활동에 할애되었다고 말해도 과장하는 것은 아니다. 성령은 실제로 3권과 4권의 초점이며, 칼빈은 거기서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속활동에서 얻는 이익을 다룬다. 그는 이 이익 자체(3권)에 대하여 말한 후에, 계속 그것의 벡터들(vecteurs)로 소용되는 외적인 수단들, 곧 교회와 성례전들과 관련하여 그것을 다룬다(4권). 그런데 어떤 사람도 그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지 않다면 그리스도의 활동에서 어떠한 이익도 얻을 수가 없다. 이 연합의 구체적인 유대는 다름 아닌 성령이다. 보다 정확하게 설명하면, 그것은 성령이 신자들에게 작용하여 그들이 참으로 중보자의 구원의 활동에 관계되게 하기 때문이다.

성령의 주된 활동은 -개혁자는 성령의 “대표적인 활동”(chef d'oeuvre)이라고 말하는데- 그리스도와 우리의 교제의 구체적인 양식인 신앙이나 다름없다. 이 교제로부터 칭의의 은혜와 성화의 은혜라는 이중의 은혜가 나온다. 이 두 실재들은 각각 따로 다루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그것들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에 뒤이은 논의에서는 신앙의 하나의 특별한 양상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그것에 의해서 신자는 성서 안에서 하나님 자신의 말씀을 알아보면서 성서에 대한 그의 신앙을 인정한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분석하려는 것은 단지 성서와 성령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첫째로, 개혁자는 열광주의자들이 즐겨 하는 것처럼 이 둘을 서로 대립시키고, 성서의 필요를 제거하기 위하여 성령의 친밀한 교통을 강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칼빈에 의하면, 성서의 계시와 어떠한 관련도 갖지 않는 특별 계시에 호소하는 것도 주제넘은 일이다. “하나님은 매일 하늘로부터 말씀하시지 않기” 때문에, 즉각 이 계시들의 진정성의 문제가 제기된다. 영지주의자들은 성령에 호소한다. 예, 그러나 그것은 어떠한 종류의 영인가? 어떻게 우리가 순전히 주관적인 운동과 하나님의 영의 운동을 식별할까? 게다가, 우리가 직접적인 영감을 받았다는 것을 구실로 성서를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유일한 영이 아니라는, 마치 하나님이 오늘 그의 영이 과거의 성서 기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던 것을 부인하는 것처럼, 터무니없는 결론에로 이끌 것이다.

성서와 성령은 결코 대립적인 것들로 생각되어서는 안 되며, 그 둘은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사실, 이것이 이 주제에 관한 칼빈의 중심적인 주장이다: 성령만이 성서의 영감의 확실성과 그것의 신적인 권위를 가져다준다. 하나님만이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증인이 되시며, 그분만이 성서를 통하여 그가 참으로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신자들의 마음에 확신시켜줄 수 있다. 칼빈은 이것을 성령의 은밀한(또는 내적인) 증거라고 말하였다.

그로써 두 가지 주장들의 유효성이 상실된다. 그중 첫째는 교회의 주장이다. “만약 교회가 복음을 믿도록 마음을 감동시키지 않으면, 나는 복음을 믿지 않을 것이다”는 어거스틴의 견해를 따라서 가톨릭 신학자들은 교회만이(예컨대, 후대에 교회의 ‘교학권’이라고 불렸던 것) 마치 과거에 정경을 확립할 자격이 있었던 것처럼, 거룩한 책들을 인증할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관하여 칼빈은 본질적으로 성서의 보증인으로서 교회를 세우는 것은 인간의 판단 위에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세우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대답하였다. (이것이 그의 반대자들이 말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우리가 지금 말하려는 것은 칼빈의 정확함이 아니라 그가 논박하는 방식이다.) 같은 이유로 칼빈에 의해 유효성이 상실된 두 번째 주장은 인간의 이성이다: 하나님의 권위를 인간의 이성의 판단 위에 둔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다음의 유명한 구절을 인용하며 끝맺기로 하자. “이것은 아무 이론도 필요로 하지 않는 확신이다. 곧 이것은 최고 이성으로 말미암아 입증된 지식이며 실로 이 지식 안에서 우리의 마음은 어떤 이론에서보다 더 안심하고 더 견고하게 쉴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하늘나라의 계시가 아니면 만들어낼 수 없는 감정이기도 하다. 내가 지금 여기서 말하는 것은 비록 내 말이 그 문제를 올바르게 설명하기에는 부족하긴 하지만 신자 개개인이 마음에서 경험하는 바를 말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다른 곳에서도 이 문제가 재론될 것이기 때문에, 나는 여기서 여러 가지 논의를 생략하기로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우리 마음에 인치시는 신앙만이 참된 신앙이라는 것은 여기서 알고 지나가자.”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칼빈은 성서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모든 이성을 넘어서 계신다는 확신에 근거하는 이성을 주장하기 위해 재담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개혁자는 감정, 곧 지성에 앞서는 감정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모든 지성을 넘어서는 감정이라는 용어에 호소하였던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성서에 두는 신뢰는 그것이 모든 사람에 관여하고 어떤 제안들에 대하여 우리가 동의하는 것에 의한 지적인 확신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더없이 “실존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반복하면, 이 확신은 증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에서 나온다: 스스로 증거하는 그 행동을 통하여 하나님은 사람을 신자로 변화시키면서 신자의 마음에 그의 말씀의 권위를 보증한다. 이렇게, 내가 성서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보는 사건은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시어 내가 신자가 되는 것과 같은 사건이다. 성령이 내 안에서 신앙을 일으키는 바로 그 순간에 나는 성서를 믿게 된다.

 

성령과 칭의

Articulus stantis et cadentis Ecclesiae, “교회의 사활이 달린 조항”: 루터는 이 말을 신앙에 의한 칭의의 문제를 말하기 위해 사용했다. 그는 이것을 신앙의 근본적인 조항, 그 말의 문자적인 의미에서, 곧 토대가 되는 조항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신앙에 의한 칭의? 신앙의 다른 모든 조항들에 의미를 주는 조항이다. 물론, 칼빈의 관점은 루터의 그것과는 전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 사실상, 신자들에 의한 그리스도의 영적인 점유는, 더 낫게 말하면, 그리스도가 이루신 사역의 혜택을 신자들에게 허락하는 성령의 작용은 칭의에 제한되기는커녕, 성화 혹은 중생을 똑같이 포함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네바의 개혁자는 신앙에 의한 칭의를 “기독교의 주된 조항”으로 언급한다.

칼빈은 “칭의”를 루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그의 선택된 자들을, 그들이 여전히 죄인들로 남아 있지만 의롭다고 간주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그 주제는 외견상 역설적일 뿐이다. 그것은 사실상 한 사람의 의는 전혀 그 사람 자신에게 돌아가지 않으며, 어떤 특별한 장점의 결과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가 의롭다고 간주되고, 의롭다고 여겨지는 한에서 의로운 자들이다. 그 의는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이 의는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베푸시는 성령의 활동에서 기인한다. 칼빈은 여기서 사람 안에는, 그에게 고유한 어떤 자질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는커녕, 하나님이 밖에서부터 그것을 주셨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낯선 의”라는 루터의 표현을 다시 취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선물은 의롭게 된 사람의 실질적인 변화에 대하여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바꿔 말하면, 칭의는 내용이나 본질의 변화로 나타나지 않는다. 마치 그것에 의해서 신적 본질이 인간적 본질을 변경시키기나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루터의 제자이며 이점에 관해서는 그의 스승에게 불충한 안드레아스 오시안더(Andreas Osiander)가 “본질적인 의”에 대해 말하는 데 따라, 『기독교강요』에서 특별히 이 점에 관해 주장한다. 이 주장에 반대하여, 칼빈은 신자의 의는 사실상 신자들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고유한 “자질”이라고 반복하여 말한다. 의의 선물을 전가로서 생각하는 것은 정확히 그것을 신자의 존재론적인 변화로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인간 안에서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혼합도 아니다. 개혁자는 그와 같은 주장을 위해서 지나치게 하나님의 초월을 보호하는 일에 주의하였다. 이것이 또한 그가 칭의는 성령의 활동이라고 주장한 이유였다. 칭의는 의의 실질적인 교통이기는커녕, 영적인 교통이다. 따라서 이것은 성령의 신학이 초월의 신학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칭의에 관하여, 사람들은 자주 어떻게 “신앙”이 “신앙에 의한 칭의”라는 표현으로 이해되는가하는 질문을 자주 제기한다. 칼빈이 내린 정의는 다음과 같다: “만약 우리가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은혜의 약속 위에 근거해 있고, 성령에 의해 우리의 오성에 계시되고 우리의 마음에 인쳐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한 의지에 대한 굳고 확실한 지식이라는 것을 밝힌다면, 우리는 신앙에 대한 완전한 정의를 갖고 있는 것이다.” 칼빈주의의 신앙은 우리가 단순한 신념이라고 부르는 그것에 환원될 수 없고, 또한 우리 밖에 있는 어떤 것의 상태에 대한 단순한 인식과도 비교될 수 없다. 오히려 성령의 선물로서 신앙은 하나님과 우리의 현실적인 관계, 다시 말하면, 우리의 칭의와 의롭게 된 자로서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의 조건 자체의 본질을 이룬다.

여기까지 칼빈의 교리와 루터의 교리에는 참된 차이가 없다. 그렇지만 제네바의 개혁자의 교훈이 비텐베르크의 그의 선배의 그것과 동등시될 수 없는 점이 있는데, 그것은 행위의 칭의에 대한 것이다. 그로써 칼빈은 확실히 행위에 의한 칭의에 다시 떨어지지 않는다. 문제되는 것은 행위에 대한 칭의이다. 그 교리는 다음의 문장에서 간략하게 제시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후에 그의 무죄함에 의해 우리의 잘못이 가려져서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들로 나타나는 것과 같이, 그렇게 우리의 행위는 그 안에 있는 악이 그리스도의 순결함에 덮어져서 우리에게 전가되지 않고 의롭다고 간주된다. 그로써 우리는 오직 신앙만으로 사람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행위가 의롭게 된다고 정당하게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또한 우리는 비-전가(non-imputation)의 맥락에서 전가의 개념을 발견한다. 왜냐하면 사람의 칭의가 현실적으로 그의 것이 아닌 의의 전가에 있는 것과 같이, 그렇게 그의 행위의 칭의는 그의 것들인 잘못의 비전가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칭의는 완전하며, 그것은 모든 사람을 포괄하고, 우리 안에 그것을 받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고 또 우리 안에 그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은혜로운 것이라고 이해한다.

 

성서에 대한 칼빈의 호소

 

피터 오피츠 (취리히 대학교)

 

1. 서론

올리베탕 성서 서문에서 칼빈은 간결하고 생생한 용어로 성서를 격찬하였다: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열어주는 열쇠”, “그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거울”, 그리고 “그의 선하신 의지에 대한 증거”이다. 또한 그것은 “길”, “지혜의 학교”, “왕의 홀”, 하나님의 “지팡이”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유롭게 그의 은혜 가운데 우리를 영원한 끈으로 자신과 결합시키면서 우리와 체결한” “계약의 도구”이다(CO 9, 823).

이 표상들은 잘 선택된 것들이다. 그것들은 칼빈의 신학에서 성서의 중대한 중요성을 드러내준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들은 기독교인들이 성서에서 찾고 발견해야 하는 것들을 가리킨다: 성서는 하나님이 지배하는 구원의 영역에 들어가는 통로를 우리에게 열어주고, 마찬가지로 열쇠는 그렇지 않으면 닫혀져 있을 방을 열어준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우리 자신을 알게 해준다. 물론, 간접적으로, 예언자들과 사도들의 증거를 통해서 알게 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마치 거울을 통해서 보는 것처럼 분명하게 보여준다. 성서는 세대를 통하여 공동체를 인도하고 동행한다. 왕의 홀과 같이 그것은 길을 가리키고, 목자의 지팡이와 같이 그것은 보호하고 안내한다. 칼빈은 전적으로 성서를 그 저자의 견지에서 이해한다: 하나님의 선한 의지에 대한 증거로서 그것은 준수되어야 하는 율법의 모음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 자신이 성서 안에서 그의 아버지다운 신실함의 약속과 함께 우리를 “끌어당기신다”(참고, III.2.27).

 

2. 유일한 계약의 증거인 성서

그래서 칼빈에 의하면, 성서 전체는 구약과 신약성서를 포괄하는 하나의 은혜의 계약을 증거한다. 구약성서에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혜와 신실성이 문제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성서에서 진행적인 계약의 역사를 발견한다. 그리스도의 출현 이후, 구약성서에는 이제는 유효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는 언제나 인간들과 그들의 시대에 자신을 맞추시기 때문이다. 칼빈은 계약의 이 역사를 떠오르는 태양과 점차적으로 밝아지는 빛의 이미지로 설명한다(참고, I.13.1; II.9.2; II.11.5). “그리스도는 참으로 율법 하에서 유대인들에게 알려졌지만, 오직 복음 안에서 아주 명료하게 계시되었다”(II.9).

 

3. 성서의 진리

그러나 어떻게 우리는 성서가 우리에게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 관하여 진리를 말한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칼빈은 몇몇 인상적인 증거들을 언급한다: 성서문서들의 고전성, 거기서 증거되는 기적들과 예언들, 장구한 세월동안 나타난 영향력과 능력,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가 그 증거이다. 그러나 그런 논거는 결코 충분하지 않고, 그리고 정당한 이유에서 그러하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면,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그때는 오직 하나님만이 그의 말씀의 진리를 보증하실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로 그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셔서,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받은 말씀을 예언자들이 충성스럽게 선포하였다는 사실에 대하여 우리에게 확신시킬 필요가 있었다”(I.7.4). 성서의 진리와 확실성에 관한 확신은 오로지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과 동일한 방식으로 획득된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시고, 그의 영을 통하여 인간의 마음에 믿음과 복종하려는 의지를 불러일으키신다(참고, Ⅰ.7.5).

칼빈은 성서영감론을 발전시키지 않았다. 그는 그의 시대의 탁월한 인문주의적 방법의 도움을 받아 성서연구를 장려하였다. 그리고 동시에, 본문의 히브리어와 헬라어 표현들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찾고자 하였다.

 

4. 그리스도, 성서의 원천, 중심 그리고 영혼

그리스도는 모든 계시의 원천(Ⅰ.13.7), “진리의 유일한 빛”(이사야서 강해 29,11-12)이시기 때문에, 칼빈은 신약의 문서들만이 아니라 또한 “모세의 전체 가르침”이 그 모든 부분에서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로마서 강해 10,4)고 말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통하시지 않고는 어떤 방법으로도 사람들에게 자기를 계시하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아담, 노아, 이삭, 야곱 그리고 그밖의 사람들이 하늘 교훈에 대하여 얻은 것은 모두 이 원천에서 마신 것이다”(Ⅳ.8.5).

구약성서가 다양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도래를 예상하며 가리키는 한편, 신약성서는 오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이렇게 모든 성서는 그 중심에서 중보자이며 구속자이신 그리스도를 알린다.

이것은 성서가 우리에게 율법과 계명을 요구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가 없다면, 성서의 모든 규정들은 죽은 문자들에 불과하다(참고, 고린도후서 강해 3,17). 그러나 생명 없는 육체가 살아 있는 영혼을 통하여 형태를 갖추고 힘을 얻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율법은 율법의 영혼인 그리스도에 의해 활력을 얻게 된다. 이렇게 율법은 유익한 하나님의 교훈으로서 받을 수 있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칼빈에게 성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거기에서 모든 기독교 공동체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과 그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배우고 체류하는 “학교”이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의 하나님의 의지

 

프랑수아 데르망즈 (제네바대학교)

 

하나님의 의지는 나의 삶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가? 칼빈은 이 본질적인 물음을 다양하게 제기하였다: 내가 정말 하나님의 의지를 따르기를 바라는가? 어떻게 그것을 아는가? 어떻게 그것을 실천할까? 여기서 나는 이 물음들을 간략하게 다룰 것이다.

 

1. 하나님의 의지는 나의 삶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아무도 자발적으로는 하나님의 의지를 따르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 칼빈의 견해이다. 우리의 타고난 능력에 의해서, 그것이 의에 관한 것이든 혹은 다른 사람들을 향한 우리의 의무이든 간에,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선한 것들을 지각할 수 있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같이 대해주기를 기대하면서 그것들을 따른다. 그러나 그것이 십계명의 첫 번째 돌 판에서 묘사된 것과 같은 하나님의 의지에서 나온 것일 때 우리는 흥미를 갖지 않는다.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은 우리에게 자발적인 것도 아니고,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그를 사랑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지에 우리의 귀를 막게 하는 것은 우리의 자기 사랑이기 때문이다(Ⅱ.8.1).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복에 기여하는 것에 관하여 하나님보다 더 잘 안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이, 그가 우리의 소망에 응하지 않을 때, 우리의 적이라고 믿게 된다. 만약 그가 금지령을 내린다면, 우리는 단지 우리의 삶을 방해하는 금지령만을 들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선 하나님은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우리의 나태에서 깨어나게 하신다(Ⅲ.3.7). 그리고 그는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허황된 이미지를 흔들고, 우리의 자기 확신(Ⅲ.2.23), 의(Ⅱ.2.1, Ⅲ.3.7), 의지, 생각과 감정들(III.3.8)을 손상시키는 것으로 그렇게 하신다. 이 굴욕의 순간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벗어버리고 우리의 타고난 성질에서 떠나도록 하기 위하여 필요하다(Ⅲ.3.8). 그러나 그의 말씀을 듣는 순간에 하나님은 그의 어조를 바꾸고, 강제로 우리를 제압하려 하지 않고 엄격함보다는 오히려 자비를 택하신다. 그는 참된 호의를, 곧 상태 못지않게 관계를 보여주시며 우리를 “유인한다”(Ⅱ.10.8) : 우리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용납되었기 때문이다. 해방되고, 용서받고, 용납되고 그의 자녀들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께 속해 있고 하나님께서는 주저하지 않고 그의 사랑을 베푸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만약 하나의 요구가 있다면, 그것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단지 그때 신자는 율법을 하나의 굴레가 아니라 그것에 의해서 하나님이 자신의 의지를 알게 하고, “잘 살고” 행복에 이르는 길을 찾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에 응답하는 은혜로서 이해할 수 있다. 칼빈은 루터에 동의하여 율법이 논박하는(고발하는) 용법, 곧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함에 직면하게 하여 우리 자신의 곤궁을 깨닫게 하는 용법과 시민 사회적 용법, 곧 정의로써 인간의 질서를 확고하게 하는 용법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가장 본질적인 것은 루터가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던 세 번째 용법인데, 곧 율법은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에 대한 안내와 전거로서의 용법이다:

“율법의 세 번째 용법은 가장 중요한 것이며, 율법의 중심적인 목적에 더욱 가까운 것이다. 이 용법은 하나님의 영이 이미 그 마음속에 사시며 주관하시는 신자들 사이에서 발견된다. 비록 율법이 하나님의 손가락에 의해 저들의 마음에 기록되고 새겨져 있지만, 바꿔 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영의 감동과 격려로 하나님께 복종하겠다는 열심이 있지만, 그들은 여전히 두 가지 방면에서 율법의 혜택을 입고 있다. 왜냐하면 율법은 그들이 앙모하는 하나님의 의지와 그 지식을 매일 더욱 철저히 배우며 확실하게 이해하는데 최상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마치 주인을 잘 섬기고 그의 마음에 들고자 하는 종이 주인의 버릇과 습관에 순응하기 위하여 그것들을 익숙하게 알고 잘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 필요성은 아무도 피할 수 없다. 율법을 매일 공부하여도 하나님의 뜻을 더욱 순수하게 아는 일에서 새로운 전진이 없으리만큼 지혜가 많은 사람은 지금까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우리는 교리 뿐 아니라 또한 훈계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종이 율법에서 받는 혜택은 이 방면에도 있다. 즉 율법에 대해서 자주 명상함으로써 하나님께 복종하고자 하는 일에 고무되고 그것에 확신을 갖게 되며 그의 잘못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Ⅱ.7.6-12).

칼빈에게 두려움, 자비 그리고 율법은 계약, 곧 우선 이스라엘에게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표명된 계약의 모태이다.

 

2. 하나님의 의지를 어떻게 알까?

우리는 이미 살펴보았듯이 이것은 율법에 의한 것이지 단순히 성령의 영감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율법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점에서, 히브리 성서의 613개 계명들은 우리의 삶의 매 순간들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어떤 계명들을 지켜야 하고 또 어떤 계명들이 그리스도의 도래에 의해 무효가 되었는지를 결정하기 위해 율법을 해석할 필요가 있다. 칼빈은 율법에 있는 “의식적인” 모든 것을 배제한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대부분의 의식은 그리스도에 의해 주어진 영적인 의미를 육적으로 예시하였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는 재판에 관한 율법들을 시대에 뒤진 것들이라고 평가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그것들이 제정되었던 역사적 맥락에 의해 결정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남아 있는 것은 도덕에 관한 율법이다:

“우선 도덕에 관한 율법을 보면 거기에는 두 부분이 있다. 한 부분은 순수한 믿음과 경건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고, 또 한 부분은 진실한 애정으로 우리 이웃을 대하라고 한다. 따라서 도덕에 관한 율법은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모든 민족과 모든 시대의 사람들을 위해서 정해 주신 의의 표준 곧 참되고 영원한 표준이다. 하나님의 영원불변한 의지는 우리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경배하며 우리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기 때문이다”(Ⅳ.20.15). 이같이 율법은 십계명의 두 돌 판에 의해 보다 발전된 형식을 취하며, 사랑의 이중 계명으로 요약된다. 하나님에 관한 첫 번째 돌 판은, (1)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 (2) “너희는 우상을 만들지 못한다.” (3)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4)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지켜라.” 이웃에 관한 두 번째 돌 판은, (5) “너희 부모를 공경하여라.” (6) “살인하지 못한다.” (7) “간음하지 못한다.” (8) “도둑질하지 못한다.” (9) “너희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하지 못한다.” (10) “너희 이웃의 아내나, 너희 이웃의 소유는 어떤 것도 탐내지 못한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우리가 이 율법을 잘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죽이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는 것으로 충분한가? 칼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그는 각각의 계명이 부정적인 방식으로 표명되었고(너는 ...을 하지 마라),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방식으로 바꿔 말해야 한다고 하였다. 예컨대, 제7계명의 의미는 타인의 생명을 “소중하고 값진” 것으로 여기고 모든 일을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Ⅱ.8.9). 사랑의 계명의 맥락에서 율법을 해석하는 것은 신자들의 참된 거룩함을 위한 무한한 요구에로 문을 여는 것이다.

 

3. 어떻게 율법을 실행할까?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능력으로는 아무도 거룩함에로 부르는 율법에 따라 살아갈 수 없다. 그러나 신자는 그들이 그들 자신의 삶을 거부하는 것으로 자신들을 “억제하는” 한에서 그들을 “살아 있게 하는” 성령의 도움에 의지할 수는 있다. 세례 요한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잘 묘사하였다.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요 3:30).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만약 그것을 하나님을 위해 인간을 희생시키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애매해질 수 있다. 그와 반대로 칼빈은 경건한 남자들과 여자들이 믿을 때, 하나님의 형상이 그들 가운데서 점차적으로 회복되며 더욱 인간적이 된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 순간에, 하나님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는 더 이상 서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선율과 화음” 속에서 공명하게 된다. 이 구절의 라틴의 본문에 따르면 symétrie et consensus 이다.

“우리의 중생의 목적은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의와 우리의 순종 사이에 조화와 일치를 나타내며,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아주셨다는 사실을 더욱 확고하게 하려는데 있다”(Ⅲ.6.1).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자신의 삶에서 부르심에 따라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인간의 응답 사이에는 어떠한 모순도 없다고 이해한다(Ⅲ.17.6). 소명은 이렇게 좁은 선 위에 서는 것이다: 한편,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과 그의 은혜에 종속되는 것이다; 다른 한편, 그것은 인간에게 감사함으로 그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그의 모든 정력을 다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사람이 모든 행동에서 각각 자기의 소명에 관심을 둘 것을 요구하시기”(Ⅲ.10.6) 때문에 관계되며 칼빈은 이 소명을 로마법에서 물려받은 “신분”의 문제에 접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로마법에 의하면, 개인의 신분은 국가에 대하여 권리와 의무를 갖는 안정된 그의 지위이다. 신분에는 세 가지 유형들이 있는데, 자유인이나 노예의 신분, 여성과 아이들에 대조되는 결혼한 남성(가족의 아버지)의 신분, 행정관이나 평범한 시민의 신분이 그것이다. 하나의 신분은 다른 신분에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예컨대, 한 사람이 여러 신분을 가질 수 있는데, 곧 그가 자유인이면서, 동시에 가족의 아버지와 행정관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각각의 수준에서, 각 사람은 주어진 상황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서 그의 자리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칼빈은 이 소명을 “신분과 삶의 방식”으로 정의하면서, 그것을 “신분”이상으로 여러 활동과 특히 직업에로 확장한다. 칼빈은 그때 루터를 따른다. 만약 상부상조의 목적이 우리를 서로 의존적이 되게 하는 것이라면, 직업은 서로 도와주는 가장 구체적인 방식들 가운데 하나이다:

“어떤 유익을 자기 형제들에게 가져다주기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들이란 없다”. 이렇게 소명은 하나님께 속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닮는 것을 유일한 목표로서 헌신하는 신자 안에서 감정적이고, 직업적이며, 지적이고, 영적인 삶의 여려 면들을 한데 모은다(Ⅲ.6.2). 그러나 칼빈은 착각하지 않았다. 그러한 기획은 한 순간에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일생을 거치는 기획과 의미라는 것이다:

“이 회복은 한 순간이나 하루나 한 해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한 평생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어떤 때에는 느린 걸음으로, 그가 선택하신 사람들 속에서 육의 부패를 씻어버리며, 그들의 죄책을 깨끗이 없애며, 그들을 그의 성전으로 주께 바치게 하신다. 그리고 그들의 온 마음을 새롭게 하여 진정한 순결에 이르게 하시며, 그들이 평생을 통하여 회개를 실천하며 이 싸움은 죽음이 와야만 끝난다는 것을 알게 하신다”(Ⅲ.3.9).

 

교회가 세상의 권력자들과 정부와 갖는 관계

 

프랑수아 데르망즈 (제네바대학교)

 

칼빈의 주된 원리는 “땅의 일에 대한 이해는 하늘의 일에 대한 그것과 다르다”(Ⅱ.2.13)는 것이다. 한편에는, 하나님과 그의 나라, 참된 정의와 미래의 삶의 불멸성이 있다; 다른 한편에는 인간적인 현실들, 곧 정치, 경제 그리고 철학적 반성과 함께 하는 왕의 통치가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원칙적으로 이 세상의 일에 개입해서는 아니 되고, 정치도 신앙의 일에 개입해서는 아니 된다. 그러나 좀 더 면밀히 살펴보면, 칼빈의 입장은 보다 복잡하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은 그를 신정 혹은 종교 당국의 통치 아래 있는 정부의 옹호자라고 보거나, 다른 사람들, 예컨대 한 세기 전에 개혁자들의 벽을 세웠던 사람들은 그를 현대 민주주의의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것을 안다. 틀림없이 이 두 입장들은 모두 잘못된 것들이지만, 그것들은 우리가 칼빈을 두 가지 매우 다른 의미에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첫 번째는 많은 결실이 있다고 판명되었고 여전히 판명될 수 있는 종교와 정치적 문제들 사이의 관계들에 대한 개혁자의 견해를 고려할 때 모든 시대착오를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오늘날보다 폭력이 직접적이며 가시적으로 자행되며 종교개혁의 발전은 어쨌든 왕의 의지에 달려 있었던 시대를 살았다. 틀림없이 칼빈의 시대와 같이 종교 전쟁들이 막 일어나려고 하는 때에는 권력에 대한 같은 접근법을 취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두 번째는 마음이 평온한 상태에서 발전된 적절한 신학적인 주장들과 행동의 격한 상태에서 개혁자가 말하거나 행했던 것들 사이를 구별하는 일인데, 그것은 그가 진리를 위해 싸울 때 때로 정치가 그 진리의 승리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세르베투스 사건과 반삼위일체 입장을 금지하기 위하여 그에게 사형을 선고한 법정에서 칼빈이 한 역할을 상기할 수 있다. 세르베투스가 행정관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을 때, 칼빈은 제네바의 시민이 아니었다. 그래도 칼빈은 그 선고에 찬성하였고 세바스티앙 카스텔리용은 그가 논리적이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개혁자를 그의 신학의 같은 토대 위에서 논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칼빈이 그의 시대의 두 명의 왕들에 대하여 취한 태도는 그의 사상의 “상황적” 면모를 보다 잘 설명해준다.

1547년에 앙리 8세의 유일한 적자인 에드워드 6세가 그의 나이 10세에 영국의 왕좌에 올랐을 때, 개혁교회들 사이에는 무한한 희망이 퍼져갔다. 사실 그의 삼촌 개신교도 에드워드 시무어의 자문을 받는 어린 왕이 그의 아버지에 의해 시도된 교회의 개혁을 이룰 것이라고 믿었던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그로부터 1년 후에, 칼빈은 에드워드 시무어에게 주저하지 않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순전히 복종하게”하고 단지 재세례파들만이 아니라, 또한 “로마 가톨릭의 우상의 쓰레기와 혐오스러운 것들을 간직하기를” 원하는 가톨릭 신자들을 “검으로 진압하라”는 권고를 하기 위해 편지를 보냈다. 탄압은 정치적인 정당성을 갖는다. 왜냐하면 두 그룹들은 모두 반역자들로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무엇보다도 종교적 차원을 갖는데, 그 까닭은 개혁자의 해석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왕들의 임무에 반대하는 모든 자들은 반역자들로 일컬어지기 때문이다. 그들의 정치적 모델은 구약성서의 경건한 왕 요시야였다. 그는 율법을 되찾아서 실천에 옮겼던 왕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칼빈이 세 가지 점에서 요약하는 정치적 프로그램이었다: 개혁교회 신앙고백의 위대한 노선을 따르면, “사람들을 가르치고” 폐해를 근절하며 악습을 교정하는 것이다. 이전에 그렇게 자주 그와 관련되어 강력하게 신정의 혐의를 받은 개혁자는 결코 없었다. 그의 의도는 좌파든 우파든 복음에 대한 그의 해석에 함께하지 않는 모든 자들을 물리치기 위하여 세속 당국을 움직이려는 것이었다. 적어도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는 그의 동기를 감추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왕들의 칙령과 법규들은 기독교 국가를 진척시키고 유지하는 좋은 수단들이다.” 요시야처럼, 에드워드 6세는 위대한 개혁파 군주제의 희망을 무산시키면서 1553년에 너무 일찍 죽었다.

칼빈은 프랑스 왕 프랑수와 1세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어조를 사용하였다. 왕은 처음에는 개신교도들에 우호적이었지만, 1534년에 개신교도들이 그의 궁궐에 게시한 “벽보사건” 이후에 태도를 바꾸고, 개신교도들을 박해하였다. 칼빈은 1536년판 『기독교강요』서문에 부친 편지에서 그를 더 이상 요시야와 대조하지 않고, 솔로몬을 상기시키는 일종의 판관이라고 불렀다. 물론, 왕이 “하나님의 진실한 교역자”로서 간주되고 그의 통치는 “하나님의 영광을 섬기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만, 그러나 그가 어느 한 교파나 다른 교파를 지지할 때보다는 오히려 정의와 평등의 보증인으로서 행동할 때 그의 임무를 다하는 것일 것이다. 그는 파벌들을 넘어서, 개혁파들이 아니라 단지 반역자들만을 박해하면서, 평화롭게 그의 나라의 일치를 유지해야 한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 두 입장들은 상황에 의해 규정된 것들이다. 동료 개신교인이 잠재적인 박해자와 같이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 그러나 기독교강요에서 발전된 입장은 종교와 정치적 문제들의 상관관계에 대한 칼빈의 기본 생각에 보다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칼빈은, 구약성서의 왕의 모델들을 넘어서, 시이저와 바울의 로마서의 유명한 본문(롬 13장)을 언급하기 시작하였다. 집권자들은, 그들이 그리스도교인이든 아니든, 하나님에 의해 제정된 자들이며, 따라서 그들을 경멸하거나 거부하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의 질서를 뒤엎으려고 의도하는 자들이다. 그들의 권위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섭리에 맞서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치는 인간사의 질서에서 본질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인간 사회에 요구되는 공정함을 이루고”, “시민 사회의 정의에 우리의 덕성을 세우며”, “사회의 안정과 평화를 확보하게”하는 것이다. 정치가 세상의 일과 정의에 전념할 때, 설령 그것이 그 사실을 모를지라도, 하나님의 계획안에, 교회가 복음의 진리를 설교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 못지않게, 그의 자리를 갖게 되는 것이다. 집권자는,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세상에서 하나님의 대리 혹은 부관이며(IV.20.9; cf. IV.20.4), 그의 신하들 앞에 있는 섭리의 대표자이다(IV.20.6). 그러면 정치 체제가 취하는 형태는 상관없다. 군주정치, 귀족정치, 혹은 민주정치가 각각 장점과 불리한 점을 갖고 있다(IV.20.8).

이렇게 정치는, 그것이 여전히 세속적일지라도, 신학적인 차원을 갖는다. 칼빈이 세속의 체제에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경건의 공적인 형태”를 소개하고, “하나님에 대한 외적인 섬김, 순수한 교리와 경건”을 장려하고 유지하며 “전체로서의 교회의 상태를 지키는” 임무를 맡겼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임무는 이중적으로 제한된 것이다: 그것은 외적일 수밖에 없고, 엄밀하게 말해서 영적인 것이 내적인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본성, 곧 성서도 계시도 필요하지 않는 자연의 질서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러나 정치가 불의하게 처신할 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칼빈은 우선 그러한 경우에서조차 하나님의 섭리에 계속 의존하는 왕의 행동에 복종하라고 권면한다:

“만일 우리가 몰인정한 왕에 의해 가혹하게 고통을 당하거나, 탐욕스럽거나 사치스러운 왕에 의해 약탈을 당하거나, 무관심한 왕에 의해 경멸을 당한다면, 간략하게 말해서, 만일 우리가 사악하고 불경한 왕에게 괴롭힘을 당한다면, 우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범한 잘못들을 기억하자. 의심 없이 주께서는 그러한 채찍들로 징벌하시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겸손은 우리의 조바심을 억제할 것이다. 그리고 이 악들을 억제하는 것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며, 우리에게 남은 것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임을 숙고하자. 그 까닭은 그의 손에 왕들의 심장과 나라들의 성쇠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 추론은 하나님이 압제자를 폐위하지 않는다는 어떤 이유가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 이유들이 교육학적이라는 것이나 -우리의 잘못들을 교정하는- 혹은 그것들이 그 계획 속에서 비밀로 남아 있다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본질적인 것은 우리가 그의 섭리를 따르는 것을 배운다는 것이며 이렇게 우리가 고통, 눈물과 탄식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인 기쁨을 발견한다는 것이다(Ⅲ.8.10). 비록 철학자들은 이런 경우에 압제자를 타도하라고 하였을지라도, 칼빈은 복수에 대한 모든 욕망을 물리치고(II.2.24; cf. I.17.8), 압제자 주살을 금한다(III.10.6).

그러나 하나의 원칙이 복종보다 우세하다: 사람들에게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행 5:29).

“우리는 집권자들의 명령에 마땅히 복종해야 된다고 했지만, 그 복종에는 항상 한 가지 예외가 있어야 한다. 아니 예외라기보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일이다. 즉 그러한 복종이 우리를 왕들의 모든 법령이 마땅히 복종해야 할 분에 대한 복종에서 돌아서게 해서는 안 된다. 왕들의 모든 명령도 그분의 명령에 양보해야 하며 왕들의 권력은 그분의 위엄 앞에 굴복해야 한다”(Ⅳ.20.32).

기독교강요를 결론짓는 이 절은 독자를 곤혹스럽게 한다. 그들의 백성을 하나님께 대한 복종에서부터 돌아서게 하는 왕의 명령은 무엇일 수 있는가? 만일 칼빈이 여기서 프랑스 왕의 명령을 참고하고 따라서 종교적 박해를 참고했다면, 왕의 우상숭배는, 가톨릭주의에 대한 그의 애착으로 이해되는, 저항을 정당화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인가? 그때 칼빈은 복종에 대한 그의 모든 주장을 부정할 것이다. 그는 왕들의 권위 위에 자신의 사상을 위치시키고 새로운 주장을 밝힐 것이다.

이 해석이 어떤 역사가들에 의해 옹호된다고 할지라도, 나는 이런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개혁자가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의 의지는 성서나 하물며 그것에 대한 개혁파들의 해석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모두에게 알려진 기본적인 법이다. 정치는 계시를 무시할 수 있지만, 칼빈은 정치가 한 분 하나님이 계시며 이 하나님의 법이 왕의 통치보다 더 기본적이라는 것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칼빈은 억지로 인정한다: 왕이 저마다의 양심에서 잔혹한 부정행위라고 인식되는 것을 선이라고 선언하면서 그의 권력을 선과 악의 절대적 기초로서 행사할 때, 정치는 타도되어야 한다.

이 입장은 우리에게 시대에 뒤진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우리는 오늘날 더 이상 정치가 가장 사소한 종교적 요소들조차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는 정치가 어찌할 수 없는 인권, 저 절대적인 권리들에 대한 사상을 강하게 지지한다. 이 권리들은 어떤 의미에서 개혁자의 직관을 다시 취한 것이다. 우리는 정치가 그러한 권력을 제한하는 기본법을 침해하지 않는 한 정치에 복종해야 한다. 만일 그것이 기본법을 침해한다면, 그것은 전제주의적이고 모든 합법성을 상실했다고 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