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개혁과 여성: 칼빈 500주년을 기념하며』


이재천 (한국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소장)



        세월의 흐름을 따라 역사를 더듬다 보면 ‘그 때 그 사건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겠다’ 싶은 경우를 발견하곤 한다. 그렇지만 사건에 얽힌 인과관계를 밝히다 보면 ‘역사적 필연’이라고 표현하기는 주저하게 된다. 무엇보다 ‘그 사건’을 가능하게 했던 인물들의 삶에 공감하게 된다면 말이다.

        종교개혁은 마치 남성들의 영역에서 일어난 사건처럼 보인다. 역사책을 얼핏 살펴보면 루터, 부처, 멜랑흐톤, 쯔빙글리, 불링거, 파렐, 칼빈, 베자 등, 온통 남성형 이름뿐이다. 그런데 그 이름들을 통해서 일어난 사건 속으로 들어가 보면, 사건을 품어 낸 또 다른 존재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칼빈은 종교개혁을 태동케 한 인물은 아니지만, 앞선 세대가 벌여놓은 사건의 의미와 내용을 정리하고 체계화하여 개혁교회를 일으켜 세우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런 칼빈의 능력을 알아 본 인물이 파렐(Guillaume Farel)이다. 파렐은 스쳐지나가려던 칼빈을 제네바에 붙들어, 자신이 여러해 전부터 시작해 놓은 개혁을 완성하게 했다.

        파렐은 칼빈이 태어나던 해(1509)에 파리 대학에서 공부하게 되면서 프랑스 개혁운동을 주도하던 르페브르(Jacque Lefèvre d'Etaples: 1455-1536)의 영향을 받아 개혁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르페브르를 중심으로 한 개혁 세력이 탄압을 피해서 비밀 집회를 갖던 곳이 파리 동쪽에 위치한 도시 모(Meaux)였다. 파렐은 모 그룹의 일원이었다.


        모 그룹의 모임이 가능했던 것은 왕(Louis XII)의 누이였던 나바라의 마가렛 공주(Marguerite de Navarre: 1492-1549)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가렛은 교육을 받은 경건한 여성으로써, 널리 인정받는 시인이기도 했다. 그녀는 끝을 모르는 정치적 음모와 타락으로 점철된 절대왕정의 지배집단 속에서 새로운 변화의 필요성을 실감했던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마가렛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참 교회를 회복하려는 개혁 세력의 보호자가 되어 주었다. 그녀의 영향력 덕분에 프랑스에서 개혁운동에 대한 본격적인 박해가 여러 해 동안 지연되었다. 그녀의 고귀한 정신은 딸 달베르(Johanna d'Albret)에게 이어졌다. 달베르의 아들 앙리 4세는 낭트 칙령(1598)을 발표함으로써 개신교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프랑스에서 개혁 세력은 루이 14세에 의해서 낭트 칙령이 폐지될 때(1685)까지 한 세기 정도 더 유지할 수 있었다.

        박해가 진행되면서 마가렛의 영지 네락(Nérac)은 개혁 정신이 깃들어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되었다. 여러 개혁자들이 네락을 중심으로 개혁 세력을 모았으며, 르페브르는 그곳을 인생의 마지막 도피처로 삼기도 했다. 모 그룹으로부터 사상적 영향을 받았지만 아직 개혁운동에 뛰어들지 않고 있던 청년 칼빈이 르페브르를 만난 곳도 네락이었다.


        칼빈은 바젤에서 『기독교강요』를 출간한 다음 해인 1536년 봄, 이탈리아 북부의 페라라(Ferrara)를 방문했다. 페라라의 공작부인(Duchess of Ferrara) 르네(Renée de Este: 1510-1575)를 만나기 위함이다. 일설에 의하면 칼빈을 페라라로 보낸 사람이 나바라의 마가렛이다.

        르네는 루이 12세의 딸로서 마가렛의 조카였는데, 르네와 마가렛 두 사람 사이에는 세대를 넘어서는 정신적인 교감이 있었다. 르네는 페라라의 공작(Ercole II, Duke of Ferrara)과 결혼하여 공작부인으로 불렸지만 정신적으로는 주체적인 인물이었다. 그녀는 고대 언어, 철학, 시와 문학 등을 두루 공부했으며, 당대의 정신적 지도자들을 그녀의 영지로 초대하는 일을 즐거워했다. 그녀의 영지 페라라는 곧 북부 이탈리아의 문화적 중심지가 되었다. 아마 그녀의 주변에서 그녀를 가장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면 남편인 공작이었을 것이다.

        르네 자신이 개혁정신에 공감하고 있었기에, 개혁 사상을 지닌 인물들도 초청하였다. 그 중에 샤를 데스베빌(Charles d'Espeville)이란 가명을 사용하는 칼빈도 포함되어 있었다. 르네는 칼빈과 대화를 충분히 나눌 시간을 갖지 못했다. 그녀의 영지에서 발생한 불경죄 사건으로 말미암아 칼빈이 6주 만에 페라라를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혹자는 르네의 영지에서 불경죄로 붙잡혀갔던 이들 중에 옥중에서 사라진 장(Jean de Bouchefort)이란 인물이 칼빈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사실 여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르네가 공작의 온갖 방해를 무릅쓰고 장(Jean)을 구하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정치적 수단을 사용했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짧은 기간 이후, 두 사람은 서신으로 서로의 생각을 나누게 되었는데, 공작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교류는 칼빈이 세상을 떠나기까지 약 30년에 달하는 세월동안 계속되었다. 임종 직전의 칼빈이 남긴 마지막 두 편의 편지 중 하나는 르네의 편지에 대한 답신이었다. 이 편지는 칼빈 자신이 병으로 약해져 남의 손을 빌려 쓰고 있음에 대한 사과로 시작해서, 개혁신앙의 자유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꼭 해달라는 간절한 부탁으로 마무리된다. 두 사람 사이의 깊은 존중과 신뢰, 그리고 복음에 대한 헌신과 사랑을 담고 있는 이들 편지는 개혁신앙에 기초한 인간관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주는 표본이 된다.


        일반적인 칼빈의 이미지는 날카롭고 신경질적이며 권위적인 남성의 모습이다. 그의 초상화들 탓이다. 현존하는 칼빈의 거의 모든 초상화가 그의 생애 후반기에 제작되었는데, 병으로 인해서 고통 받는 비쩍 마른 모습을 담고 있다. 칼빈이 급하고 날카로운 성격을 가졌다는 것은 그 자신이 누누이 인정한 바다. 그러나 동시에 칼빈은 어린 소녀의 심성과도 같은 섬세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섬세한 심성을 가장 잘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그의 편지이다.


        칼빈은 시대의 사고방식을 앞서는 여성관을 갖고 있었다. 그의 여성관은 주로 신약성서의 고린도서, 에베소서, 디모데서 등, 바울 서신에 대한 주석, 그리고 지인들과 주고받은 그의 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칼빈은 남녀가 기능적으로 서로 다르지만 본질적으로는 동등하다고 믿었다. 그는 역사적 현실에서 드러나는 여성의 불평등을 인정한다. 칼빈 자신도 그러한 전통적인 가치관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남녀의 차별 현상은 어디까지나 인간 역사의 지평에서 나타나는 것일 뿐이며, 하나님 앞에서 남녀는 본질적으로 동등하다고 생각했다.

        여성의 역할과 지위와 관련되어 바울서신에 나타나는 여러 본문들의 대한 주석에서, 칼빈은 “여성의 종속은 ‘전통적이고 문화적인 양식’일 뿐이다. 구체적인 상황의 필요에 의한 것이며, 하나님의 영원한 법에 따른 것은 아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초기 교회에서는 여성들이 공적 목회 영역에서 널리 활동했음을 지적한다.

        칼빈은 역사 현실에서는 제약이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여성이 교회 공동체에서 책임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금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나아가 그는 성령께서 여성으로 하여금 교회의 지도적 역할을 하도록 세우실 것이라고 믿었다. 여성의 공적 활동과 역할에 대한 칼빈의 견해는 16세기 당시의 관점에서 보면 대단히 예외적인 생각이었다.


        칼빈의 여성적 감성은 그의 신학 세계에 깊이 반영되어 있다. 대표적인 예가 교회론이다. 독일의 개혁자 루터의 교회론에서는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공동체”란 개념이 일관되게 강조되고 있다. 교회의 성격이 ‘선포와 들음이라는 일방적인 관계’로 표현된다. 반면에 칼빈에게서 교회는 ‘품에 안아, 젖을 먹여 키우는 만남의 관계’로 표현된다.

        종교개혁자들의 교회론에는 어거스틴의 영향이 크게 반영되어 있다. 어거스틴의 교회론에는 이중적 개념들이 겹쳐진다. 하늘의 교회가 이 땅의 교회에 의미를 준다. 이 땅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제도를 갖춘 교회이다. 그런데 어거스틴은 이 땅의 교회를 여성적인 이미지로 즐겨 표현한다. 그래서 ‘참 어머니, 그리스도의 신부, 왕이신 그리스도의 편에 선 여왕, 심지어 순결한 동정녀’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거스틴은 인간적인 출산과 영적 출산을 비교하면서, 첫 태어남은 남자와 여자로 태어난 것이지만, 두 번째 태어남은 하나님과 교회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이 흘러넘치는 교회의 과제는 ‘하나님의 새 자녀를 출산하고, 양육하고, 후견인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

        칼빈은 중세 교회의 교회론을 비판하고 거부하면서도, 어거스틴의 ‘어머니 교회 이미지’ 만큼은 신중하게 받아들여 발전시켰다. 칼빈에 의하면 교회의 기초는 ‘하나님의 은밀한 선택과 내적인 부르심’에 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아시고, 은밀하게 부르셔서, 품에 안아 주신다. 이 땅위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안아 주시는 품이 교회이다. 그래서 칼빈이 『기독교강요』에서 눈에 보이는 교회(the visible church)의 본성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용어가 ‘어머니’이다. 칼빈은 “어머니(교회)가 우리를 잉태하고, 낳고, 가슴에 안아 적을 먹여 기르고, 육신을 벗을 때까지 안내해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생명에 이를 수 없다.”고 말한다.


        여성적 이미지의 교회론은 칼빈의 목회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26년 동안 목회하면서 수많은 갈등에 휩쓸렸지만, 자기의 힘을 내세우기보다 오히려 ‘나를 죽이라’는 희생의 자세로 일관했다. 나아가 종교개혁 교회는 칼빈의 여성적 감수성에 기초한 새로운 리더십 덕분에 더 큰 분열을 방지할 수 있었다.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인물들을 살펴보면 모두가 대단한 개성의 소유자들이다. 그런 인물들 사이에서 견해의 차이를 조정하여 일치를 이루어내기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칼빈은 한편으로는 개혁자들 사이의 신학적 차이를 연구하고 분석하여 갈등의 원인을 규명해 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개별적인 차이를 넘어 본질적 일치를 확인함으로써 서로의 주장을 품어 화합하게 하는 노력을 계속했다. 그 결과로 개혁교회가 틀을 갖추게 되었다.


        오늘의 교회를 본다. 모든 것을 힘(power)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전통적인 남성적 사고방식, ‘경쟁과 정복’을 지향하는 남성적 가치관이 아직도 대세를 이루고 있다. 신앙조차도 개인의 목적 성취를 위한 도구가 되어 버린 모습이다. 이러한 모습으로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수 없다.

        교회의 희망은 스스로 변혁함에 있다. 그런데 교회의 변혁은 물리적 힘이 아니라 ‘자기 부정’의 정신에서부터 비롯한다. 이 예수의 정신은 온갖 아픔을 품어 새로운 생명의 싹을 틔우는 ‘어머니’들의 가슴에 본래적으로 살아있다. 그렇다면 교회의 희망은 우리 교회 안에 이미 자리하고 있다. 이제 역사의 그늘에서 가려져왔던 존재들의 진가가 드러나야 할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