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장신학연구소 목회와 신학연구 세미나 가을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09년 9월 10일 목요일 12시부터 4시까지 세미나가 진행되었습니다.
발제는 김창주박사님께서 수고해 주셨습니다.
아래 내용은 김창주 박사님의 설교자를 위한 성서연구 두번째 세미나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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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를 위한 성서 연구

2009년 9월 17일


한기장신학연구소                                                                  김창주



1. 내가 그의 ‘마음’(לב)을 강퍅하게(개역) 완악하게 (개정)

        마음, 혹은 심장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לב는 출애굽기 4장 21절을 비롯하여 서두에서  20 차례나 언급된다. 성서에서 감정을 표현하는 신체부위가 다양하게 등장한다. ‘아이고, 배야, 창자가 뒤틀려서 견딜 수 없구나’(렘 4:21). 출애굽기에 여러 차례 표현된 ‘마음’은 번역에 따라 ‘고집’(새번역), ‘억지’(공동번역) 등으로 옮겨졌으나 원문은 ‘마음’이다.

        심장은 사람이 태어나는 시점부터 죽을 때까지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움직인다. 신체에서 순환계의 중추기관으로서 혈액을 순환시키는 원동력이며, 주기적인 수축과 이완을 되풀이하여 혈액을 온몸에 공급하는 펌프역할을 한다. 따라서 심장이 멈춘다면 생명도 없다. 이런 점에서 심장은 인간의 생각과 지적인 행위, 즉 이해와 통찰력, 의식과 반성, 판단과 선택 등이 비롯되는 곳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마음이 강퍅해진다는 것은 선과 악의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는 뜻이 되고 바로는 스스로 마음이 강퍅해져서 하나님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놔주지 않은 것이다.

        이와 같은 마음의 성질을 잘 깨달았던 이스라엘은 마음이 딱딱해지지 않고 부드럽고 탄력있게 활동하도록 제도적인 장치를 강구하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모세오경을 일 년에 한 차례, 탈무드는 7년 반에 완독할 수 있는 제도적인 틀을 갖추고 있었다. 즉 매주 안식일에 낭독할 오경과 매일 읽어야 하는 탈무드의 ‘다프 요미’를 그날그날 읽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모세오경의 경우 일 년 동안 안식일 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면 일독을 할 수 있다.

        성서일과의 마지막 안식일을 ‘토라 심하트’라고 하는데 특별한 행사가 벌어진다. 이 때는 오경의 마지막 신명기와 창세기의 처음을 읽게 되어 있다. 신명기의 마지막 글자는 이스라엘의 ל이고, 창세기의 첫 자음은 ‘태초에’의 ב가 된다. 이 두 글자를 연결하면 심장(לב)이 된다. 토라는 처음과 마지막이 있는 일반적인 책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토라의 끝은 곧 다시 시작이라는 의미다. 마치 심장이 한 인간의 일생 동안 펌프질하며 혈액을 공급하듯이, 이스라엘이 존재하는 한 ‘토라’는 이스라엘의 심장으로서 항상 읽고 늘 가까이 해야 하는 말씀이라는 상징이다.


2. 광야 (מדבר) vs 말씀 (דבר)

        광야, 또는 사막을 가리키는 미드바르는 경작되지 않은 목초지를 비롯하여 불모지, 황야, 그리고 바위가 많은 고원지대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지역을 뜻한다. 그러나 광야는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고, 이스라엘 백성에 연단 받은 곳이며, 엘리야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치고 시험받았다. 예수께서 공생애에 나서기 전에 40일을 밤낮으로 금식하며 수련한 장소도 역시 광야이다.

        다바르는 단순한 말씀이 아니라 창조할 수 있는 힘, 곧 ‘창조력’을 의미한다. 특히 말씀이라고 할 때 기록된, 입으로 명령된 것이라는 고착적인 의미로 제한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진 창조력은 단지 구술되거나 기록된 형태로만 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드바르 → 광야로 번역되지만 이 단어를 분석해보면 ‘말씀으로부터’라는 뜻이다. 즉 광야는 일교차가 심하고 생명을 위협하는 여러 맹독류의 해충과 짐승들이 우글거리는 곳이다. 그럼에도 왜 수행자들은 먹을 것이 구비되어 있는 안락한 집과 거처를 떠나 거친 모래바람이 숨을 편하게 쉴 수 없게 하는 곳, 음식을 먹고 잠을 자기에 불편한 곳 광야로 가는 것일까? 그러나 수행자들은 삭막한 모래 언덕과 파란 하늘만 보이는 사막에서 불편을 감수하며 수련하는 동안 하나님 경험을 하였다. 즉 수행자들이 ‘광야’로 간 까닭은 하나님의 창조력인 ‘말씀으로부터’ 힘과 능력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수행자들에게 광야(מדבר)는 죽음과 공포의 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דבר)을 깨닫는 장소이며 말씀을 새롭게 이해하고 충전하는 장소가 된다. ‘다바르’는 원래  ‘뒤에 가지런히 있다, 물러나다’는 등을 뜻한다. ‘광야’에 물러서서 수행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음성을 듣는다면 그 말씀은 광야에서 비롯된 것이다. 실제로 모세는 십계명을 비롯한 오경의 대부분 말씀을 광야에서 받지 않았던가! 광야에서 비움으로써 오히려 말씀으로 채우는 ‘말씀’과 ‘광야’의 역설을 살펴본 것이다.

3. 홍해바다? 갈대바다?(10:19; 15:4)

        갈대 바다(ים סוף)의 번역은 이따금 말썽이 되어 교회 안팍을 시끄럽게 만들기도 한다. 이것은 히브리어 열린 체제, 즉 모음이 없는 상태로 오랫동안 정경의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을 모르기 때문에 생겨난 해프닝이다. 히브리어 갈대가 홍해로 번역되는 데는 라틴어 옮기는 과정에서 생겨난 오역으로 보인다. evruqra/| qala,ssh| (LXX), mare Rubrum(Vulgate). 이집트 하구에 빨간 산호층이 있는 부근을 가리키는 표현인지, 수초들이 시들 때 물의 색깔이 붉어진다는 에돔 어디쯤인지 가늠하기 어렵고 만족할 대답을 기대할 수 없다.

        히브리어 ‘수프’를 반드시 ‘갈대바다’라고만 읽도록 하지 않는다는 데 관점을 두어야 한다. 즉 현재 확정된 모음대로 읽는다면 ‘갈대 바다’이지만 ‘바다의 끝’(소프)이 될 수도 있고, 바다를 넘어가는 ‘경계선’(사프)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물/바다와 관계를 고려하면 해석의 여지가 한층 넓어진다.

        일찍이 순자(荀子)는 물의 생리와 이중성을 잘 이해하여 백성과 군주의 관계를 물과 배로 비유하여 비유한 바 있다. 물이 배를 운행하게도 하지만 더러는 전복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물이란 가뭄에 단비가 되기도 하고 태풍의 폭우가 될 수도 있으며, 강물에 배를 띄울 수도 있고 홍수가 배를 삼킬 수도 있다. 고대인들에게 물은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물질이면서도 동시에 공포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고센 땅에 정착할 때 이집트는 적당한 비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필요하였지만 제국이 되어 그들을 학대할 때는 이미 홍수처럼 사나워서 제지할 방법이 없었다.

        마침내 모세는 하나님의 사자들의 인도를 받아(14:19)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거대한 이집트 제국을 탈출하게 되었고 급기야 갈대 바다에 다다랐다. 이스라엘을 삼키려는 압제와 수탈의 이집트 제국의 ‘끝’이자 자유의 길로 갈 수 있는 ‘경계선’이며 새로운 세상을 여는 ‘문턱’이 이른 것이다. 

        따라서 물이 갈라지는 대목(21절)과 함께 앞의 14장 19절을 동시에 읽어야 한다.


19이스라엘 진 앞에 가던 하나님의 사자가 그들의 뒤로 옮겨 가매 구름 기둥도 앞에서 그 뒤로 옮겨 20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 저쪽에는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쪽에는 밤이 밝으므로 밤새도록 저쪽이 이쪽에 가까이 못하였더라 21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하나님의 천사가 앞서 가다가 이스라엘 뒤로 옮겨간 뒤에 바다가 갈라진다. 이것은 물이 갈라진 그 곳, 즉 ‘바다의 마른 땅’을 내딛는 발걸음은 스스로 결정하고 판단할 일이지 천사가 앞에서 인도할 수 없다는 한계를 분명히 밝힌다.


4.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라’(레위기 24:16)

       이 규정이 실제로 유대인들에게는 강력한 힘을 행사하게 된 역사적인 계기가 있었다. 구약성서의 언어 히브리어는 역사적으로 볼 때 두 차례 제국의 언어를 만나 새로운 경험과 전통을 갖게 된다. 즉 히브리어는 기원전 6세기에 바빌론에서 아람어를 만났고, 그로부터 약 3세기 후에 그리스어를 경험하게 된다. 그 만남과 변화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이름 네 글자가 있었다. 히브리어와 아람어는 사촌 언어라고 불리고 실제 그만큼 비슷하다. 즉 글자의 형태나 문법은 물론 많은 경우 단어까지도 유사하기 때문이다. 이점은 정복당한 약소국 이스라엘에게 유리한 점이기도 하였지만 반대로 예기치 못한 혼란과 엉뚱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특히 거룩한 네 글자에 대한 읽기와 태도는 히브리어 대신 아람어로 읽게 되면서부터 결정적으로 달라진다.

        기원전 597년에 시작된 바빌론 포로는 고레스의 칙령으로 기원전 538년 일부는 귀환하였지만 기원전 450년경의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귀환을 기준으로 한다면 유대인들은 최소한 1세기를 훨씬 넘는 기간을 아람어 문화권에서 지냈다. 이 말은 히브리어를 모국어로 쓰던 세대는 완전히 사라지고 아람어 세대가 적어도 3 차례 정도 흘렀다는 의미다. 디아스포라 유대인 3-4세대라면 히브리어보다는 아람어 구사가 훨씬 쉬었을 것이고 그들에게 모국어는 아람어인 셈이다.

         히브리어 נקב는 ‘모독하다,’ ‘저주하다’는 뜻이지만 아람어로는 (이름을) ‘부르다,’ ‘칭하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이 규정을 히브리어로 읽으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경우로 한정되는데, 아람어로 읽으면 그 이름을 부를 수조차 없는 금지명령이 된다. 따라서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출 20:7)는 십계명 말씀과 강력한 아람어 버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라’(레 24:16)가 이전보다 더욱 엄격한 계명과 규정이 된 것이다. 이렇게 되자 경건한 유대인들은 ‘거룩한 네 글자’를 부르기는커녕 읽을 수조차 없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호칭이 필요하였고 마침내 아도나이로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구약성서에 거룩한 네 글자 יהוה가 총 6,823 차례 언급된다. 유대인 독법에 의하면 네 글자에 아도나이의 모음이 붙여 있지만 읽을 때는 그대로 읽지 않고 ‘아도나이’라고 발음해야 한다. 그렇지만 히브리 전통과 독법을 모르는 중세 번역자들이 ‘여호와’로 표기하면서 본래 발음과 다른 이상한 이름이 되었다. 그러면 ‘아도나이’와 네 글자가 연속으로 쓰일 경우는 어떻게 발음하는가? 이 때는 ‘엘로힘’에 들어있는 모음을 붙여서 ‘아도나이 엘로힘’으로 읽어야 한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기도할 때를 제외하고 ‘아도나이’라는 발음조차도 불경스럽게 여기고 그 대신 하쉠, 또는 아도-쉠 등으로 읽는다. 또한 글자로 표기할 때는 G -d 로 쓰기도 한다. 이와 같은 거룩한 네 글자에 대한 존경은 새로운 전통을 낳았고 본래의 발음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5. ‘자유의 길’에 서 있는 이스라엘: 비하히롯, 믹돌과 바알스본 사이(14:2)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룻길을 가서 믹돌과 바알스본 사이, 곧 ‘비하히롯 앞’에 장막을 치고 첫 날 밤을 보낸다. 이 세 지명이 어디인지 명확하게 알 수 없거니와 설령 알아낸다고 해도 그 자체가 큰 의미는 없다. 그렇다면 왜 성서 기자는 이렇게 알듯 말듯한 지명을 일일이 언급하는 것일까? 그것은 믹돌, 비하히롯, 그리고 바알스본으로 상징되는 의미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선 믹돌은 ‘높은 탑’이나 ‘망대, 요새’를 의미하며 이집트어를 빌려온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믹돌은 이스라엘이 종노릇하던 당시 세계 최고의 지배 세력인 이집트와 그들의 군사 시설을 압축적으로 상징하는 표현이라고 보면 된다. 한편 바알스본은 고대 가나안의 주신 ‘바알’과 그의 거처와 예배 중심지로 알려진 ‘사본’(수 13:27), 혹은 사폰산(Zaphon)을 가리키는 말이 결합되었다. ‘사본’산은 가나안 족의 올림푸스 산이라 할 만하다. 이런 점에서 바알스본은 앞으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그리고 가나안에 정착하여 끊임없이 맞닥뜨리게 될 우상 ‘바알의 본 고장’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비하히롯은 무슨 뜻일까? 비하히롯은 ‘비 + 하히롯’의 결합 형태로서 ‘비’는 실제 발음으로 ‘피’에 해당하고 의미는 ‘입구, 또는 현관’을, 그리고 ‘하히롯’은 자유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자유의 입구’라는 뜻이 된다. 이스라엘이 종살이 하던 이집트에서 탈출한 것은 곧 종의 멍에를 벗어내고 자유인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속박의 공간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해서 자유를 만끽할 수 없다.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뒤에 있는 믹돌의 기억, 즉 자신들을 압제하던 제국의 흔적이 자유를 방해하기도 할 것이고, 또한 앞에 있는 바알스본이 만끽할 수 있는 자유에 유혹을 드리울 것이다. 이집트에서 나와 자유인이 되었으나 여전히 불안한 자유인, 아직도 유혹의 덫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자유를 얻은 것일까?


6. ‘아멘’(אמן)과 ‘오래 버티기’(אמונה)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 한지라’(에무나)(출 17:12)

해가 질 때까지 그의 팔은 처지지 않게 되었다(공동).

해가 질 때까지 그가 팔을 내리지 않았다(새번역).

→ (모세의) 손의 ‘버티는’ 힘이 해가 질 때까지 계속되었더라(직역)


        우리가 일상적으로 ‘아멘’할 때 이 말은 히브리어 ‘확신하다, 지지하다’ 등의 뜻으로 이해한다. 아멘의 본래 뜻은 ‘오래 버티다, 꾸준히 지속하다, 끈질기게 밀고가다’이다. 여기에서 ‘믿음, 꾸준함, 견고함, 신뢰’ 등의 명사형이 파생한 것이다. 온 구약성서에 40 여 차례 나오는 이 표현은 대부분 ‘신실, 진리, 성실’ 등으로 옮겼다(신 32:4, 시 37:3, 119:86, 잠 12:17, 사 25:1, 렘 5:1). 그러나 중세 교회개혁 때문에 잘려진 하박국 2장 4절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에서 ‘에무나’는 유독 ‘믿음’으로 번역되었다. 이 구절은 아마도 교회개혁의 기치를 내세울 때의 루터의 슬로건이었기 때문에 그의 독일어 번역 영향으로 오랫동안 ‘믿음’으로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에게 믿음은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는 바울의 가르침 때문인지 보통 ‘믿음’이라면 머리로 깨닫고, 가슴으로 이해하며, 입으로 소리 내어 고백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심지어 믿음을 구원의 날짜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믿음이 있다’고 간주하는 극성스러운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구약성서의 믿음, 혹은 신실함이라는 극성스럽게 신앙생활 하다가 제 풀에 넘어지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란 순간적인 확신이나 소신, 또는 영감이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끝까지 버티며 마지막 순간까지 견디는 힘과 의지를 가리킨다. ‘믿음’이 구약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장면은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싸울 때 모세가 손을 들고 있는 순간이다.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 (모세의) 손의 ‘버티는’ 힘이 해가 질 때까지 계속되었더라. 모세가 손을 들고 끝까지 끈질기게 버팀으로써 이스라엘은 아말렉과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7.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게 하라(17:14)

        아말렉과 싸움을 승리한 후 ‘기록하라, 기억하라, 귀에 두라’는 권면으로 그 단락을 마감한다. 이렇게 동사가 세 차례 이어지는 것으로부터 이스라엘의 독특한 역사관을 살펴볼 수 있다. 즉 역사의 연구가 우선은 기록에서 시작하고, 두 번째로는 기억한다는 것, 그리고 ‘귀에 심어두라’는 세 단계의 훈련과정을 거치게 한다는 점이고, 나아가 신앙적인 의무 사항으로 권고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물론 이와 같은 과거 회상이 병적인 집착으로 오해할 필요는 없다.

        일상적으로 ‘기념하라,’ 또는 ‘기억하라’로 번역하는 히브리어 자카르(זכר)는 단순한 지적인 행위나 과거에 있었던 사건을 회상한다는 의미거나, 역사의 창고 한켠에 먼지 뒤집어 쓰고 있는 정보와 자료를 캐내는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즉 ‘기억’은 인식적인 회상, 정보의 재생산이 아니라 ‘염두에 두다’로 옮기면 그 본래적인 의미가 분명해질 것이다. ‘염두에 두다’는 의식적으로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는 행위이며 적극적인 관여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기억하는’ 태도는 자발적이며 과거의 ‘그것’이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상대가 된다. 따라서 ‘기억하라’에는 의식적으로 머릿속에 두고 주의를 기울이며 관심을 갖고 책임적으로 참여하라는 의미로서 결국 ‘준수하다, 실천하다’와 교환 가능해진다.<241>

*remember → ‘기억함’으로써 다시 제자가 된다?


8.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제사장 나라가 되며’(19:5-6; 벧전 2:9)

        엄격한 의미에서 ‘제사장 나라’는 있을 수 없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제사장은 아론과 그의 후손에게만 허락된 지위였다. 여기에서 사제 계급의 특징은 제사를 전담하였다는 표면적인 현상을 넘어선다. 즉 그들은 읽고 쓰는 능력을 가진 특수한 계급이었다.

        ‘상형문자’란 ‘사제의 문자’를 의미한다. 즉 영어 clerical은 ‘성직에 연관된,’ 혹은 ‘서기나 필사자에 연관된’이란 뜻이다. 이것은 중세의 유산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성직자들의 당시 교육을 독점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사장 나라’는 문맹이 아니라 ‘글을 읽고 해석할 수 있는 문해력’으로 풀이해야 한다. 고대 사회일수록 글은 특정 사제 계급만 독점하였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제사장 나라’는 모든 사람이 글을 배우고 지식을 쌓을 수 있는 공동체와 사회를 가리킨다.

        이런 점에서 ‘제사장 나라’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읽고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특히 지금 우리는 수없이 많고 많은 이른 바 ‘말씀’과 사설(邪說)의 홍수 가운데 살아간다. 더구나 인터넷의 발전은 이와 같은 말씀과 사설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어디나 스며들어 혼란에 빠뜨리며 어지럽히고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 ‘제사장 나라’는 홍수처럼넘실거리는 지식과 정보를 읽고 아는 수준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신비한 운행 계획과 섭리를 알아차리고 식별한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9. 토라 - 삶의 뿌리

        이스라엘의 모든 삶은 근거는 토라, 곧 ‘율법’에 두고 있다. 흔히 ‘율법’으로 번역된 토라는 본래 ‘가르침,’ ‘교훈’ 등을 뜻하는데 동사 ‘야라’(ירה)에서 비롯된 낱말이다. 히브리어 사전에 따르면 야라는 구약성서에서 다음과 같이 다양하게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① (활을) 쏘다, 던지다 (삼상 20:20,36; 삼하 11:20; 욥 30:19)

② 비가 내리다, 물을 뿌리다 (호 10:12; 사 55:10-11)

③ (기둥을) 세우다 (창 31:51), (주춧돌을) 놓다 (욥 38:6-7)

④ 가리키다, 제시하다 (창 46:28; 잠 6:13)

⑤ 지도하다, 감독하다 (레 10:11, 신 33:10; 삼상 12:23; 사 28:9)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야라’에는 주어가 지시하는 방향(direction)과 동시에 목표에 이르기 위한 움직임(movement)이 결합되어 있다. 그러므로 히브리어 동사 야라는 손가락으로 어떤 지점을 막연히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면 본 뜻을 놓치게 된다. 여기에는 반드시 지시하는 방향과 목표지점에 도달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이 동반된다. 그렇다면 야라 동사는 무엇을 지시하며 어떤 행동이 포함되는 것일까?

        히브리어 부모(הורה), 교사(מורה), 토라(תורה)의 어원은 하나의 뿌리, 즉 ‘야라’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세 단어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우선 부모는 자녀가 태어나는 순간 신체적인 안전과 건강에 최우선적인 관심을 둔다. 부모는 자녀의 ‘육체적인 생명’을 위하여 존재한다.

        한편 교사는 학생에게 인간의 윤리관과 인생관을 가르치며 역사관을 심어준다. 그럼으로써 학생은 스승에게서 인륜을 배우고 역사를 바르게 볼 수 있는 지혜와 시각을 갖추게 된다. 이런 점에서 교사는 학생의 ‘윤리적인 생명’을 가르친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하여 토라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바로 설정하고 약속의 땅에서 지키고 살아가야할 신앙의 방향을 제시한다. 특히 이스라엘에게 토라는 하나님과의 모든 관계, 곧 신앙, 윤리, 생활, 경제 등에 있어서 건강하고 바른 질서를 가르치는 데 그 방향은 ‘영원한 생명’을 지시한다. 따라서 토라는 현세의 삶을 바르게 살 수 있게 하는 토대와 기초(욥 38:6)인 동시에 영원한 삶을 가르치는 안내자(요 12:50)가 된다.


     ↗ 부모 - 신체의 건강한 발육과 정서적인 안정을 통한 육체의 성장(physical life)

야라 → 교사 - 윤리 의식, 역사의식을 심어줌으로써 윤리적인 삶을 지향(moral life)

     ↘ 토라 - 하나님과 이웃의 바른 질서를 실천하여 영원한 삶을 소망(spiritual life)


다시 말해서 부모, 교사, 토라에는 일정한 방향과 그 목표에 이르게 할 움직임이 공통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부모는 자녀의 안전과 건강, 그리고 번영을, 교사는 학생의 인생관과 역사관을 지시한다면, 토라는 이스라엘이 가야할 바른 길과 신앙의 길잡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부모는 자녀의 안전한 생명을, 교사는 학생의 바른 생명을, 토라는 이스라엘의 영원한 생명을 가리키는 안내자가 된다.


10. 나는 …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20:2)

        전통적으로 유대교에서는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를 제1계명으로 간주하였다. 11세기 랍비 이븐 에즈라는 이 구절이 하나의 “계명”으로 보기 어렵지만 모든 계명의 근본이며 권위의 원천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즉 이 구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명령하는 것과 같다고 이해한 것이다. 한편 대부분 기독교 신학자들은 “나는 … 너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구절을 단지 십계명의 서문으로 여기고 원래 <십계명>과 아무 상관없는 구절이었으나 나중에 편입되었을 것으로 단정한다.

        이 구절이 제1계명이든 서문이든 <십계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중차대하다. 즉 “나는 …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하는 유대교의 제1계명 혹은 기독교의 서문은 나머지 계명들 앞에서 길을 인도해주는 향도(嚮導)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하여 차일즈는 <십계명>에서 열 가지 계명은 모두 “서문”(혹은 제1계명)에서 밝히고 있는 하나님의 정체성과 떼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가 유지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열 가지 계명은 다음과 같이 이해하여야 한다. 즉


나는 … 너의 하나님 여호와라. 그러므로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나는 … 너의 하나님 여호와라. 그러므로 너는 너의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 일컫지 말라.

나는 … 너의 하나님 여호와라. 그러므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나는 … 너의 하나님 여호와라. 그러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나는 … 너의 하나님 여호와라. 그러므로 살인하지 말라.

… …


그러므로 유대교에서는 “나는 … 너의 하나님 여호와라” 이 구절을 <십계명>을 이끌어내는 단순한 서문이 아니라 첫 계명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믿으라는 권유적인 명령이 아니라 ‘신앙고백적인 계명’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