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교회의 미래와 설교」


목회와신학연구소 소장 이재천


        “변화 없이 미래가 없다.” 한 주도적인 기업이 내세우고 있는 표어이다. ‘변해야 살아남는다.’는 절박감이 우리 사회를 짓누르고 있다. 한국은 지난 한 세기 동안 지구상에서 가장 커다란 변화를 경험한 사회 중의 하나이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한가 보다. 마치 저항이 주어지진 않는 관성에는 가속도가 붙기 마련이라는 물리학의 법칙을 증명하려는 것처럼, 사회적 변화는 속도감을 더해가고 있다. 이렇게 빠르게 변하는 사회 현실 속에서 교회의 미래를 전망한다는 것 자체가 무모한 일인지도 모른다.

        21세기, 지구화 시대에 서구 사회는 ‘탈현대 (post-modernity),’ ‘탈 기독교 사회 (post-Christendom society)’를 논하고 있다. 서구의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보자면 한국 사회는 순차적인 이행단계를 거쳐 ‘탈현대’에 접어든 사회는 아니다. 우리가 ‘탈현대’를 논한다면, 그것은 ‘전통, 근대, 현대, 탈현대, 식민시대, 탈 식민시대 (traditional, pre-modern, modern, post-modern, colonial, post-colonial)' 등의 다양한 시대 의식과 가치관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는 관점에서, 새로운 개념으로 제시하게 되는 ‘탈현대적’인 사회라고 하겠다. 이런 탈현대적 사회의 특징적인 현상이 ‘가치관의 혼돈’이다.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마태복음 13:29). 인식론의 관점에서 탈현대적 사회의 특징을 잘 드러내주는 말씀이다. 가라지를 뽑으려면 먼저 곡식과 가라지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매일 접하는 정보의 양은 인류가 역사 이래 불과 한 세대 전까지 경험한 모든 정보의 양을 합친 것보다 많다. 엄청난 정보의 물결이 빛의 속도로 넘쳐흐르는 가운데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지구적인 차원에서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 문화와 문화, 종교와 종교 사이를 구분 짓던 전통적인 장벽이 점차 무너지고 있다. 지구적 자본의 움직임 앞에서 근대 역사의 산물인 국경은 더 이상의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자본의 이동뿐만 아니라 노동력의 이동 앞에서도 국경의 개념은 소멸되고 있다. 그렇지만 아직 세계적으로 이러한 변화를 선 듯 수용할 만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그래서 변화에 맞서 ‘우리 것’을 지켜야 하겠다는 ‘저항적 대응’의 몸짓이 지구상 곳곳에서 터져나고 있다. 세계적으로 보수화로의 회귀가 주요한 사회적 현상이 되고 있다. 종교적으로는 근본주의 세력이 사회적인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고, 정치적으로는 보수와 진보를 구별함으로써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갈등이 고조될 것이다.

        21세기 지구화 시대를 초래한 신자유주의는 ‘자유의 확장’을 역사적 필연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인류의 역사는 자유의 확장의 역사’라는 신 칸트적 사고방식에 기초해서, ‘경제는 시장의 원리에 맡겨야 하며, 자본의 운용에 국가나 정치권력이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그러한 주장의 이면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자본 획득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감추어져 있다. 달리 표현하자면, ‘무한 욕망을 실현하려는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자유를 인간의 욕구, 아니 ‘나’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았던 정신적 타락의 결과로 인해서, 지금 전 세계가 진통을 겪고 있다.

        21세기 초 벽두에 세계적으로 밀어닥친 경제적 진통을 극복하기 위한 처방이 긴박하게 모색되고 있다. 경제적인 관점에서는 금기시하려던 ‘국가의 개입’을 정당화 한다. 얼핏 보기에 모순인 것 같지만, ‘경제 회생을 위한 국가적 개입’이 가능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 충족되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자본의 세력은 시민들로 하여금 경제를 살리는 것이 마치 ‘절대선’인 것처럼 믿게 하면서, 국가 권력을 차지한다. 합법적 절차에 의해서 국가 권력이 자본에 종속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사태가 벌어지기 위해서는 일면적인 논리로 무장한 언론 집단이 적극적으로 기능해야 한다.

        콩 심은데 콩 나기 마련이다. 권력을 차지한 자본 세력은 경제적인 위기가 근본적으로 어떻게 비롯되었는지, 문제의 발단을 찾아 극복하려는데 관심을 두지 않는다. 권력은 오히려 문제를 촉발시킨 공룡화 된 거대 자본의 잠정적인 대리인 역할을 자처하게 된다. 그리고 ‘돈 되는 일’을 우선적인 국가정책이라고 늘어놓는다. 세계적인 파탄을 초래한 ‘삶의 양식’을 극복하기 보다는, ‘더 많은 자본을 풀어서 자본 유통의 활로를 여는 것’에 주력하게 된다. 그렇게 ‘돈의 힘’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다시 굴린다고 한들, 그 바퀴가 어디로 얼마나 굴러 가겠는가? 이 물음 앞에서 우리는 경제논리의 범위를 벗어나게 된다.

        지구화 시대의 대안적 가능성을 정치적 차원에서 찾아본다. 자본은 무시무시한 중력이 있어서 서로를 끌어당긴다. ‘끌어당길 자유’의 무한한 확장은 결과적으로 조건과 능력을 갖춘 소수의 손에 모든 것을 쥐어 준다. 그리고 사회의 다수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권리와 기회를 상대적으로 박탈당하게 된다. 사회적 다수는 자신의 욕구 충족을 정치적 행위를 통해서 성취하고자 한다. 그래서 지배체제인 정치권력을 장악하려는 일반 대중의 정치적 의지가 적극적으로 표출되게 된다. 사회적으로 소위 ‘민주적 사회제도로서 국가의 기능을 옹호하는 다수, 정치화된 대중세력’과 ‘민주주의의 이념인 자유를 옹호하는 소수, 경제 주도세력’ 사이의 대립전선이 형성된다. 이것이 지구화 시대에 사회적인 힘의 균형을 유지하게 되는 불안정한 가능성의 실체이다. 그렇지만 두 세력 사이에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공통점이 놓여있다. ‘욕구 충족’의 원리를 근본 토대로 하는 정치적 갈등이 궁극적으로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겠는가? 이 물음 앞에서 우리는 정치논리의 틀을 벗어나게 된다.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지만, 이 세상의 재화는 한정되어 있다. 그래서 인간 사회에서 남의 것을 차지하기 위한 갈등은 필연적인 현상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 『국가론』에서 밝힌 주장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 엄청난 변화가 이루어진 것 같지만, 그러나 21세기, 탈현대 지구화 시대에서도 결코 변하지 않은 인간 사회의 구성 원리이다.

        이 땅에 세워진 하나님의 교회는 온 세상을 살리기 위한 사명을 받은 공동체이다. 교회 공동체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님을 깨닫고 인정함(복음)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교회 공동체의 신앙 정신에서 우리는 신자유주의적 사고체계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과 극복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복음의 메시지는 신자유주의적 가치관 삶의 양식이 근거하는 유물론과 경험론에 대해서, 그리고 과학적 인식의 정당성에 대한 인간학적 신뢰에 대해서 철저한 거부권을 행사할 것을 명하신다. 기독교의 역사 인식, ‘불가능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인간 실존에 대한 이해, 당위론적 명령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성, 십자가를 선택하는 자유, 한 생명의 가치를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사랑, 온 세상을 품어 살리려는 꿈을 구현하는 교회 공동체의 사명 등, 삶의 본질을 붙잡고 어둠이 지나도록 외로운 씨름을 하라고 부름 받은 집단이 기독교이다.

        지난 세기가 남긴 가장 확실한 지구적 교훈은 ‘인간이 지구적 생명 파괴의 주범’이라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파괴 현상은 가속화되고 있다. 욕망의 수레바퀴는 좀처럼 설 줄을 모른다. 저만큼 앞에서 역사의 길이 그만 끊어질지도 모른다는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의 힘과 의지로 해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과학적 기술력으로는 우리가 자청해서 저지르고 있는 생태적 재앙을 극복할 것 같지 않다. 그러기에는 인간의 본성이 너무 탁하다. 교만의 그림자가 너무 짙다.

        온 생명을 살려내려면 그 만큼의 혼이 담긴 정성이 필요하다. 교회는 온 세상을 향해서 혼과 정성을 담아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해야 한다. ‘말씀’을 들으니 아골 골짜기가 생명으로 가득 차게 되었던 것처럼, 오늘의 설교 ‘말씀’을 통해서 죽음으로 치닫던 세상이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 차게 되리라. 이것이 바로 주께서 우리의 가슴에 담아주신 희망이요, 등경 아래 감추어 둘 수 없는 사명이다.

        해 아래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온 천하가 바뀌어도 복음은 일 점 일 획도 변함이 없다. 복음의 빛에서 보면, ‘교회가 살아야 세상이 산다.’ 그리고 ‘거룩한 성에는 교회가 없다’ (요한계시록 21:22).


[이 글은 ‘21세기, 교회의 미래와 설교’ 자료집 원고의 수정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