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와 한국전쟁


        [William Manchester의 『American Caesar: Douglas MacArthur』(1978)는 널리 인정받고 있는 맥아더 자서전이다. 아래의 내용은 이 자서전에서 발췌한 내용을 중심으로 하여 구성되었다.]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는 교회에 출석하지는 않았지만, 매일 성경을 읽었다. 그의 집안은 원래 감독교회(성공회, Episcopal Church)의 일원이었다. 저자인 맨체스터는 맥아더가 자신을 이 세상에서 기독교 왕국을 수호하는 가장 위대한 두 인물 중 하나로 생각했다고 맥아더의 신앙적 자의식을 표현한다. (다른 하나는 교황을 가리킨다.) 뉴욕 맨해튼에 거주하던 말년의 맥아더 부부는 성 바돌로매 교회(St. Bartholomew's Episcopal Church)의 교인이었다.


        이차세계대전을 주도한 세 인물 맥아더, 처칠, 루즈벨트가 친척 관계라는 주장은 역사적인 근거를 갖고 있다고 한다. 맥아더의 고조할머니가 Sarah Barney Belcher이다. 처칠과 루즈벨트 모두 이 할머니의 후손들이라고 한다. 족보로 따지면 맥아더와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은 팔촌간이고,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는 육촌간이 된다.


[한국전쟁, 트루먼과의 갈등]

        맥아더의 인생여정의 마지막 시기는 한국전쟁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맥아더는 이미 만으로 칠십을 맞이했다. 당시 일본 점령군의 사령관이던 맥아더는 북한이 남한을 침략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다. 남침에 대한 보고를 처음 받았을 때, 맥아더는 단순한 국경 분쟁일 뿐이며, 자신은 그런 사소한 사건에 관여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맥아더는 트루먼 행정부가 남한에 대한 침략에 맞서 군사적으로 대응할 것과, 아시아 지역의 평화와 안녕을 회복할 것을 지원하기로 신속하게 결정한 것에 대해서 놀라움을 표했다. 맥아더의 기록에 의하면, 트루먼 행정부는 의회의 동의절차도 거치지 않고, 현지에 관련된 군사 지휘관들의 조언도 듣지 않은 상태에서 한국전쟁에 개입하기로 결정했으며, 그러한 결정에는 많은 위험 요소들이 내포되어 있는데, 그 중에는 중국과 소련의 참전 가능성도 포함된다.

        북한의 침략을 공산주의 세력의 세계적 확장의 관점에서 보려고 했던 트루먼은 소련이 중동이나 베를린을 공격하고, 공산 중국이 대만을 침략하는 사태가 발생할지 모른다고 염려했다.

        전선을 방문한 맥아더는 남한이 자력으로 방어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여전히 전략적으로는 한국이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 밖에 위치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병력과 무기만 주어지면 이승만 정부를 구해낼 수 있다고 확신했다. 트루먼 행정부는 소극적인 목표를 설정했다. 침략자를 축출하는 것이었다. 반면에 맥아더의 목표는 적을 무찌르는 것이었다. 맥아더는 북한군이 ‘마치 코브라처럼 침략했다.’고 비난했다. 전통적인 전쟁관을 지닌 맥아더로서는 선전포고도 없는 전쟁 행위를 용납할 수 없었다. 

        맥아더는 트루먼 행정부가 태평양 지역에 대해서 아는바가 거의 없으며, 실제로 한국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라고 생각했다. 트루먼의 전쟁 내각은 한국 전쟁이 제한전쟁이어야 한다고 판단했지만,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고방식에 따른 ‘정당한 전쟁’(just war)의 교리를 신봉하던 맥아더는 ‘만일 정부가 마지막 수단으로 전쟁을 선택했다면, 그 전쟁은 어느 한 쪽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 지속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맥아더는 트루먼이 한국전쟁을 제한전쟁으로 한정하고 휴전협정을 추진하는 것에 대해서 정면으로 반대했다. 결국 트루먼은 맥아더를 해임하게 되고, 미 상원은 그의 해임에 대한 청문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맥아더 자서전은 트루먼과의 사이에서 빚어진 갈등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이 부분에 관해서는 트루먼의 자서전(Memoirs by Harry S. Truman, 제2권 Years of Trial and Hope)에 실린 내용과 비교하여 보는 것이 필요하다.


[장개석과 UN 결의안]

        한국을 지원하기로 한 UN의 결의안이 통과되자, 가장 기민한 움직임을 보인 인물이 장개석이다. 장개석은 잘 무장된 삼만삼천명의 국민당 군대를 파병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트루먼 행정부는 장개석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민당 병력이 남한에 진주하는 것이 모택동의 군대를 한반도로 불러들이는 결과를 초래할지 모르며, 무엇보다 장개석의 군대가 제대로 훈련되지도 않았고, 무기체계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맥아더도 트루먼의 결정에 동의했다.


[인천상륙작전]

        한국전쟁 발발 나흘 만에 전선을 방문했던 맥아더는, 한국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무엇보다 신속한 대응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적의 후방으로 병력과 병참 물자를 신속하게 투입할 수 있는 상륙작전을 생각했고, 그 후보지로 인천을 선택했다.

        맥아더의 선택에 대해서 참모들은 모두 반대했다. 참모들은 인천의 자연적인 조건이 대규모 상륙작전에 불가능함을 역설했다. 맥아더는 참모들의 주장을 듣지 않았다. 그는 이미 1894년과 1904년에, 일본이 인천으로 상륙해서 한국을 차지하고, 압록강과 만주까지 적들을 추적했던 사실을 점검하고 있었다. (청일전쟁과 동학혁명, 그리고 러일전쟁의 경우를 말한다.)

        맥아더의 참모들은 맥아더를 설득하기 위해서 19세기 일본의 군함과 현재 미 해군의 군함의 용골구조의 차이까지 설명했지만, 맥아더는 그 정도의 문제는 해결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참모들은 인천 대신 군산을 제안했지만, 전략적인 측면에서 배제되었다. 반면에 맥아더는 ‘적을 놀라게 함’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요소라고 역설하면서, 북한도 인천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것이며, 그런 적의 허를 찔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맥아더의 참모들은 오천분의 일의 확률이라는 인천 상륙작전을 준비하게 되었다.

        

[미국식 민주주의]

        맥아더는 미국식 민주주의가 2차 대전 이후 세계적인 문제의 유일한 답변이 된다고 믿었다. 그는 2차 대전 이후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전쟁들을 ‘기독교 민주주의’와 ‘제국주의적 공산주의’ 사이의 갈등으로 이해했다.


[베트남 전쟁과 맥아더]

        케네디(John F. Kennedy) 대통령은 맥아더를 존경했다. 케네디는 전임 대통령 아이젠하워와는 달리 국제 관계에 있어서 맥아더의 조언을 구했다. 대통령이 되고 넉 달 되었을 때인 1961년 4월, 케네디는 맥아더의 조언을 듣기 위해서 뉴욕으로 갔다.

        맥아더는 케네디에게 ‘아시아 주요국가에 대한 미군의 군사적 개입’의 위험을 경고했다. 훗날 케네디는 맥아더 덕분에 인도차이나 지역에 지상군을 파병해야 하는 위험을 택하지 않기로 결정했었다고 말했다.

        1964년, 케네디를 이어 대통령이 된 존슨(Lyndon Johnson)이 건강이 위독한 상태에 있던 맥아더를 입원 중인 병원으로 방문했다. 임종을 앞둔 맥아더는 존슨에게 베트남에 개입하지 말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맥아더가 얻은 명예로운 명칭]

        1961년 7월 20일, 필리핀 방문에서 돌아온 맥아더가 케네디의 초청으로 백악관을 방문했을 때,
재무부에서는 맥아더의 명예를 기리는 금메달을 만들어 전달했다. 메달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호주의 보호자, 필리핀의 해방자, 일본의 정복자, 한국의 수호자.”


[아들의 인생]

        맥아더는 아들 아더 맥아더(Arthur MacArthur)가 자신처럼 군인의 길을 걷게 되기를 바랐다. 아들의 이름도 군인이었던 아버지의 이름(Arthur MacArthur)을 그대로 붙여준 것이었다. 그는 귀국한 다음 어린 아들을 육군사관학교에 데려가 생도들의 행진을 참관하게 하는 등, 아들의 관심을 돌리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아더는 군인으로서의 삶에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결국 아더는 육군사관학교가 아니라 컬럼비아 대학교에 진학했다. 그런 아들을 보고 맥아더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아들이 선택한 길을 지지한다. 왜냐하면 내가 어머니로부터 많은 압박을 받아보았기 때문이다. 최고가 되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외로워지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내 아들이 그런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아더는 자기를 모르는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했으며, 가명을 사용하면서 음악가로서의 인생을 살았다.


[‘나는 돌아오리라.’와 마지막 기도]

        맥아더의 책상 앞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걸려있었다고 한다.

“젊음은 인생의 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이다.”

        그러나 맥아더도 세월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필리핀을 국빈 대우로 방문했던 1961년 7월 4일, 마닐라의 Luneta Park에 운집한 군중들에게 남긴 고별사를 보면, 세월의 뒤안길에 접어든 그의 감회가 진하게 담겨있다.

        “이제 작별을 고하고자 합니다. 세월이 흘러 나의 인생에는 깊은 그늘이 드려져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나는 돌아오리라’(I shall return.)는 맹서를 다시 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슬프지만 받아들이고자 합니다. 나의 형제들이여, 대신에 여러분을 위한 간절한 기도로 나의 말을 마치고자 합니다. 은혜로운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이 나라를 언제나 평화롭게 지켜 인도해 주시기를.”